울리히 츠빙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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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년 1월 1일 - 1531년 10월 11일)는 스위스의 종교개혁가이다.
[편집] 학문배경
루터보다 7주 늦은 1484년 1월 1일 토겐부르크 자치주의 빌드하우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대로 부락의 촌장을 역임해왔으며, 외할아버지는 가톨릭 사제였다. 츠빙글리는 베젠의 학장으로 취임한 삼촌에게 신학교육을 받았는데, 새로운 학문조류인 인문주의를 받아들여 조카에게 전수해 줌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했다. 10세때에는 바젤에서 라틴어 문법, 음악, 그리고 변증학을, 1498년에는 베른 대학에서 스위스 종교 개혁의 기수로 알려진 하인리히 뵐플린에게 배웠다. 1500년부터 2년동안은 비엔나로 옮겨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보호 아래 학문활동을 하였고, 1502년에는 바젤로 돌아와서 성 마틴 대학에서 라틴어를 배웠다. 1506년에는 문학석사와 석사학위를 취득 하였다.
[편집] 목회와 종교개혁
1506년 가톨릭 사제로 서품을 받았으며, 글라루스의 성직자가 되어 부임하였다. 10년의 목회 활동을 하면서 헬라어를 공부, 희랍과 고대 로마의 철학자, 시인, 웅변가, 저술가들에 대해 배웠다. 이 기간 동안에 인문학자이자 가톨릭 사제인 에라스무스와 서신교환을 하면서 우정을 쌓았으며,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는 글라루스 목회자로서 자연히 용병으로 싸우는 글라루스 연대의 군종 사제 자격으로 두차례나 이탈리아에도 갔었다. 용병제도에 반대한 츠빙글리는 그는 "스위스의 죄악, 악덕, 불신앙성, 외국숭배와 이것이 조국의 자녀들을 집어삼키는 것에 대해서" 와 "황소의 우화"을 통해서 스위스의 용병제도를 공격하였다. 이것은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아 상징적이며, 풍자적이었다. 당시 그의 모습은 신학자라기보다는 철학자, 수사학자, 인문주의자, 도덕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신념은 용병으로 먹고 살던 교구민들로부터 배척을 받아서 1516년 4월 순례지로 이름난 아인지델른으로 목회지를 옮겼다. 그는 이곳에서 설교가로 알려 졌으며, 교부들의 책을 읽었고, 면죄부의 해악성을 설교하였다. 동시에 그는 주민들에게 로마 가톨릭의 마리아 공경에 반대하고(하지만 성모 마리아가 평생 동정을 지켰다는 로마 가톨릭 교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리스도를 예배하도록 가르쳤으며, 교황청의 악덕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일부 학자들은 1516년에 스위스의 종교개혁은 시작되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용병제도에 반대하는 등 과격성을 갖고있어서, 종교분쟁의 불씨를 안고 있었다.
[편집] 사망
츠빙글리는 적이 많았다. 하지만, 교리적인 면 보다는 용병제도 반대, 숙박업 반대등 비현실적인 개혁안에 관한 성토가 대부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장일치 또는 다수에 의해서 1518년 12월 27일 츠빙글리는 취리히에 도착하였다. 취리히에 도착한 그의 종교개혁은 진행되었다.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스위스 전역으로 퍼져 나갔으나, 모든 곳에서 환영받는것은 아니었다. 산림 자치주들은 개혁교회 스타일의 개혁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자 개신교 자치주에서는 산림자치주에 생활필수품을 공급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산림 자치주는 전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수 밖에 없었다. 1531년 산림 자치주는 카펠을 쳐들어 왔다. 츠빙글리가 이끄는 취리히 군대는 10월 11일 카펠에서 교전하였으며, 츠빙글리를 위시한 개신교 목사, 의회의원 등 다수가 전사 하였다. 47세의 인생의 황금기에 접어든 츠빙글리는 개혁을 마무리 하지 못하고 끝내 숨지고 말았다. 츠빙글리는 47세라는 인생의 황금기에 죽음으로 인해서 자신이 벌여 놓았던 많은 일과 사업의 뒷 마무리를 후배인 칼뱅에게 양보하고 말았다. 이러한 면에서 같은 인문주의자로 출발해서 복음주의로 바뀌었던 칼뱅은 가장 적절한 후계자이며, 또한 완성자 였다고 말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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