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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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改新敎, Protestantism)는 1517년 10월 독일의 로마 가톨릭 신부이자 종교개혁자인 마르틴 루터의 독일 종교개혁을 시작으로, 서유럽에서 활발히 일어난 종교개혁으로 등장한 그리스도교(또는 기독교) 종파이다. 한국에서는 기독교라는 말이 흔히 개신교와 동의어 처럼 쓰이나, 엄밀히는 '기독교'는 개신교를 포함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종교들을 통칭하는 더 광범위한 말이다. 즉, 기독교에는 로마 가톨릭, 성공회, 정교회 등이 포함된다.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의 뿌리는 대체로 지역에 따른 종교 개혁 운동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 독일 지역에서는 루터의 영향이 큰 루터교가, 스위스 지역에서는 장 깔뱅의 영향이 큰 장로교 등이 있다. 이와 함께 사회개혁적인 성격의 종교개혁을 요구했던 재세례 파들도 있다. 그리고, 17~18세기가 되면서 영국 성공회에서 감리교가 갈라져 나오는 등 분파가 많아진다.
목차 |
[편집] 개신교의 믿음
개신교인들은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신념을 지니고 있다.
- 로마 가톨릭의 교권주의 즉, 종교의 권력화에 반대, 성서의 권위를 강조. 하지만 야고보의 편지를 지푸라기에 비유한 루터의 성서관에서 알 수 있듯이, 종교개혁자들의 성서의 권위 강조가 성서에 대한 맹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 개인의 내면적인 신앙과 하느님의 은총을 통한 구원을 강조
- 사제의 절대적인 역할을 부정하는 만인제사장설
- 연옥설,화체설 등의 로마 가톨릭의 교리 부정 및 비판
[편집] 개신교 종파
[편집] 루터교
[편집] 장로교 (개혁교회)
- 이 부분의 본문은 장로교입니다.
장로교는 선거에 의해 선출된 장로가 목사를 보필하는 장로제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그 시작은 장 깔뱅의 스위스에서의 종교개혁시대로 올라간다. 신학적으로는 개혁주의를 표방한다.
[편집] 성공회
영국 종교개혁으로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된 개신교 교파이다. 하지만 다른 개신교 종파들과는 달리 초대교회의 예전과 신앙 그리고 성직제도를 보존하고 있다. 대영제국의 식민지개척으로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아시아 등 세계각처로 퍼져서 지금은 각 교회가 자주성을 존중받는 세계성공회(The Anglican Communion)을 이루고 있다. 한국에서는 1890년에 영국 선교사들에 의해서 세워졌고 고종 황제의 근대화정책에 따라 영국 해군이 주둔했던 강화도를 중심으로 성장했다. 지금은 부산,대전, 서울교구가 있다.
[편집] 감리교
1729년 영국 성공회 사제인 존 웨슬리가 창시한 이 교파는, 각 신도가 엄격하게 규칙을 통해 자기 통제할 것(Methodist)을 규정한다. 영국 성공회가 복음주의라는 새로운 신앙유산을 갖게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편집] 침례교
[편집] 퀘이커
퀘이커는 친우회(형제들의 단체[Society of Friends])란 뜻을 가지며, 1650년대에 영국의 조지 폭스가 창설하였다. 국내의 유명한 퀘이커로는 씨알 함석헌 선생이 있다.
[편집] 하나님의 성회 (순복음교회)
[편집] 오순절 성회
[편집] 여호와의 증인
[편집] 한국내 개신교의 역사
[편집] 한국 개신교 교회의 출발
한국의 개신교 전래는 이미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후, 여러 번 선교사들이 선교를 시도했지만 직접적인 선교는 불가했고, 만주 지역에 있는 한국인을 중심으로 전도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후 1882년에 만주에 있던 스코틀랜드의 J.로스 선교사는 이응찬(李應贊)과 서상륜(徐相崙) 등 한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1882년 먼저 루가의 복음서을 번역해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를 출판했다. 같은 해 이수정은 일본에서 야스가와 목사의 세례집례로 최초의 개신교 신자가 되었는데, 이때가 1883년이다. 그는 나름대로 한글 성서를 번역하기 시작해 1885년에는 〈마가의 전복음셔언해〉을 출판해 냈다. 그의 성서번역은 일본에서 체류하고 있던 서구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에서의 전도를 준비하는데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한국교회 역사에서 의미가 있다. 한편, 이수정은 미국에 한국에 선교사를 보낼 것을 요청해 1884년 장로교에서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감리교에서는 아펜젤러 선교사가 파송받아 1885년 한국에 들어오게 된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광혜원을 설립하였고, 아펜젤러 선교사는 배재학당를 설립하였다. 그밖에 침례교는 캐나다의 맬콤 팬윅에 의해, 성공회는 1890년 영국 성공회의 존 코프 주교와 사제들에 의해서 전래되었다. 이들 선교사들은 한국사회와 종교역사에 영향을 주었다. 성공회 선교사들은 강화도를 중심으로 하여 강화도,충청도, 인천에서 활동하였고, 한옥양식의 강화읍교회 축성을 통해 그리스도교와 전통문화의 조화를 시도하였다. 그외 개신교 선교사들도 이화학당을 설립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이들은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에 대항할 경우 선교에 지장을 줄 것을 우려, 그리스도인들의 정치활동 참여를 반대하기도 하였다.
[편집] 초기의 발전과 갈등
[편집] 평양대부흥
평양대부흥은 1907년에 있었던 부흥이다. 평양의 그리스도인들과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뉘우친 사건을 말한다. 당시 길선주 장로를 시작으로, 신자들과 선교사들은 횡령, 교우들에 대한 교만한 태도등의 죄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이를 돌려주는 절차등을 거쳐 회개하였다. 이후로 개신교인의 수가 급증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편집] 일제 시대의 한국 교회
[편집] 신사참배
신사참배는 한국 개신교가 범한 큰 죄 중 하나이다. 1930년대 군국주의가 기승을 부린 일본에서는, 한국의 교단들을 통폐합하고, 일본과 조선의 그리스도교계 학교와 교회에 대해 신사참배를 강요한다. 이때 조선 개신교는 크게 세 가지 반응을 보인다.
- 적극 참여파
- 무관심한 소극파
- 적극 반대파
즉, 주기철처럼 종교적 이유에서 신사참배에 반대한 이, 양주삼처럼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라면서 찬성하는 이등으로 의견이 분리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감옥에 갇힌 교인과 그렇지 않은 교인 모두 고생했다면서, 친일 청산을 한국 개신교가 사실상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최근에 이에 대한 회개운동이 일어나고 있지만, 아직 적극적이지 못하다.
[편집] 광복 이후
[편집] 제1공화국
일본인들의 퇴각으로 통치행정에 심각한 공백이 생기자, 미군정은 행정상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친미적 인사를 대거 등용했다. 당시 미군정에 한국인을 천거하던 임무는 미국인 개신교 선교사의 아들이며 해군 대령인 윌리엄스(G. Z. Williams)가 맡았는데 그는 주로 개신교도를 천거하였다. 그 결과 제1공화국의 주요 국가기관과 고위직에는 개신교 인사들이 광범위하게 포진했다. 대통령인 이승만 자신이 감리교회의 장로였으며, 부통령이었던 이기붕도 감리교회의 집사였다.
해방 직후 ‘적산’으로 분류된 일본 종교의 재산 중 상당수가 개신교 예배당으로 전환되었다. 당시 개신교계의 지도급 인사인 김재준과 한경직은 미군정의 도움으로 천리교 재단을 접수하였다. 그래서 천리교 본부가 있던 동자동에는 조선신학교(한신대학교의 전신)와 성남교회가 창설되었고, 가장 큰 천리교회가 있던 저동에는 영락교회, 그리고 두 번째로 큰 천리교회가 있던 동사헌정에는 경동교회가 창설되었다.
이 시기의 개신교는 선교활동 및 교세확장에 유리한 여러 가지 제도적 특권도 얻게 되었다. 해방 당시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 개신교를 합친 전체 기독교 인구는 총인구의 2-3%에 불과하였으나, 미군정하에서 크리스마스가 국가의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었으며, 당시 국영방송의 성격을 지니고 있던 서울방송을 통하여 기독교의 복음이 일요일마다 전파되었다. 그리고 1948년 총선거 일자가 처음에는 일요일로 정해졌지만 기독교계의 반대에 부딪쳐 월요일로 변경되었으며, 1951년에는 대통령령으로 기독교만이 참여하는 군종 제도가 시행되었다. 이처럼 제1공화국은 개신교가 사실상 국교의 역할을 하는 개신교 공화국이었다.
국가 권력으로부터 이러한 여러 가지 특혜를 입은 개신교는 그 반대급부로 이승만 정권에 전폭적인 지지를 표명하였다. 제2대 정,부통령 선거 당시 개신교는 한국기독교연합회의 이름으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승만이 국기 경례를 주목례로 변경하고, 군종 제도를 허락하고, 국가 의식을 기독교식으로 하였다는 점이 그 이유였다.
이승만 정권과 개신교의 밀월관계를 강화시킨 주요 매개체의 하나는 친미 반공주의이다. 미군정의 반공주의를 계승한 제1공화국은 개신교의 적극적인 친미 반공노선과 궤를 같이 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개신교는 투쟁적인 선악 이분법에 입각하여 북한을 사탄의 세력으로 규정하였으며, 이 전쟁을 성전(聖戰)으로 간주할 정도였다. 기독교 전통 중 하나인 반전평화주의는 당시 한국 개신교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개신교의 이러한 친미 반공 이데올로기는 전쟁을 전후하여 월남한 개신교인들에 의하여 더욱 고착화되어 갔다.
[편집] 군사 정권
한국 개신교는 교회의 보호와 교세 확장을 위해 군사정권의 경제논리와 성장주의 모델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 시기에는 Explo '74와 같은 대형집회와 한민족의 복음화를 위한 대대적인 전도 운동이 연일 계속되었다. ‘3천만 명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표어는 당시 개신교 진영의 성격을 가장 핵심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외형적 성장에 주력하였던 개신교는 국가권력에 대해서 복음의 순수성과 정교분리의 이름 하에 교회의 사회참여와 민주화 운동을 철저하게 비난했다. “세상의 권세에 복종하라”는 로마서 13장의 구절은 국가권력에 대한 이들의 기본 지침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국가권력의 도덕적 정당성 여부와는 관계없이 일단 정권을 잡은 지배집단에 대해서는 거의 전적인 복종과 순응의 태도를 보였다. 집권 세력이 자신들의 영역에 개입하지 않는 한, 정부에 충성을 바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신앙인의 행위라고 굳게 믿었다. 대표적인 것이 군사 정권 시절에 등장한 조찬기도회이다. 이 기도회는 나라를 위한 기도회라는 명분을 지니고 있지만 실제로는 국가원수를 위한 기도회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이러한 기도회는 정권과 교회 사이의 연결고리로 작용하면서 개신교의 전체 이익을 침해하는 각종 법령이나 조치를 사전에 혹은 사후에 무력화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진보기독교 측의 반대되는 운동도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진보적인 기독교 세력은 박정희 군사정권에 반대했고, 가끔씩 사회의 이슈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운동 중 대표적으로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등을 들 수 있다
[편집] 개신교 전래 100주년
1988년, 개신교 전래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편집] 개신교 교회의 부패 발생
- 일부 개신교 목사들의 교권주의(성직의 권력화)
- 목회를 영업에 비유할 정도로 심각한 일부 목사들의 탐욕
- 신앙제일주의로 인한 실천의 부족
- 교회의 양적 성장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성장지상주의
- 일부 대형 교회들의 무리한 성장으로 인해 중형 교회 및 소형 교회들이 고사당하는 현상
[편집] 반(反)개신교 운동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1990년대부터 사회에 반개신교 정서가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가톨릭의 경우 제사를 인정하고, 기타 전통 문화 중시 정책 및 개신교에 비해 드러나 보이는 민주화 운동과 인권 보호 운동이 평가되어 긍정적인 반응을 받고 있지만, 개신교의 경우에는 그들의 정치적 입장이 비판자들의 주연령대인 20대의 정치와 반대되는 쪽에 서 있었고, 로마 가톨릭에 비해 일부 교회나, 기타 이단과 유사 사이비 및 신흥 종교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한 많은 보도가 이를 부추긴 면이 적잖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00년대 초반부터 소위 '기독교 안티'라는 이름으로 반개신교 운동이 등장했다. 반개신교 운동은 크게, '건전한 개신교를 위한 반개신교 운동'과 '개신교 교리 자체를 비판하는 반개신교 운동'으로 나뉘어진다. 최근에는 전자에 속하는, 개신교 내부의 자정 활동도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인터넷 상에서 진행되는 안티운동의 거의 전부는 후자의 경우이다. 이 경우의 대표적인 싸이트로는 반기련(반기독교 시민 연합)이 존재한다. 반개신교 운동이 등장한 원인으로는, 1) 개신교의 타락, 2) 개신교의 상업화 및 주식회사화, 3) 개신교의 목사와 신도들의 부정부패 4) 개신교와 정·재계의 유착이라는 개신교 전반의 문제점, 그리고 현대인들의 유일신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들고 있다. 그러나 이 운동이 일부 반개신교주의자들에 의한 기독교 전반에 대한 몰지각한 공격,비판,그리고 비난(실제로, 현재도 이러한 사이트들에서는 십자군 전쟁등의 개신교와는 무관한 사항을 가지고 개신교를 비난하고, 개신교 목사를 먹사라고 비하하여 부르는 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으로 전환되었고,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서 현재는 일반인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는 매니아틱한 운동으로 전락하여 있다.
[편집] 개신교 문화의 발전과 부흥운동의 성장
90년대 후반부터 고형원씨가 주도한 예수전도단의 부흥, 부흥 2000의 음반이 발매 되면서 개신교 음악에 대한 일반 개신교인의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부터는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등에 의해 CCM이 급속하게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일반 음반시장 못지 않은 인기를 누렸다. 2002년에는 더 콜이 개최되었고, 이때부터 한국 개신교 안에 영동제일교회과 한국 HIM등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신사도적 운동이 퍼지기 시작했다.
[편집] 사학법 개정과 정치적 갈등
[편집] Again 1907
이러한 가운데 현재, 많은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2007년의 부흥을 꿈꾸고 있다. 1907년에 있었던 평양대부흥이 다시 한 번 한국에 일어나기를 소망하는 개신교 내의 여론이 형성되었고, 이에 대한 기도운동이 있어왔다. 실제로, 2005년부터 매해 범교회적으로 'again 1907'이라는 집회가 개최되었다. 그 중, 2005년의 모임에서는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 이 집회에서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합니다'라는 발언을, 2006년에 부산에서 열린 모임에서는 부산 지역내 구체적인 사찰명을 거론하며 "부산 지역의 사찰이 무너지도록 하소서"라는 기도를 하여 약간의 논란이 있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