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톈안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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톈안먼 사건(천안문사건 天安門事件)은 1989년 6월 4일, 후야오방의 사망을 계기로 톈안먼 광장에 모인 학생과 시민들의 민주화 시위를 중국 정부가 무력으로 진압한 사건이다. 6·4 톈안먼 사건, 6·4 사건, 천안문 사태, 북경 대학살 사건 등으로도 불린다. 공식 발표로는 민간인 사망자 300여 명, 부상자 7000여 명이 발생한 사건이다. 비공식 집계로는 5천여명 사망, 3만여명 부상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 후 중국 공안부에서는 1990년 7월 10일 제5차 국무원 보고에서 민간인 사망자는 875명, 민간인 부상자는 약 14550명이 발생하였으며, 군인은 56명이 사망, 7525명 가량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고 정식으로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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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배경
덩샤오핑은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을 자신의 후계자로 정하고 그들을 정치적으로 후원하였다. 그러나 1982년 당총서기에 취임한 후야오방은 덩샤오핑의 기대와 달리 △사상 해방 △언론 자유 △개인 자유의 신장 △법치주의 △당내 민주화 등 과감한 정치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정치 개혁은 당내 보수파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후야오방은 당총서기직에 물러나야 했다.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은 오랜 침묵 끝에 사망했다.
중국의 시위사태가 후야오방의 사망을 계기로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보다 근본적으로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한 실용파가 집권하면서부터 추진해온 개혁·개방정책이 중국인의 생활 수준 향상과 함께 제반 정치·경제적 부작용도 양산함에 따라 정부에 대한 불만이 심했기 때문이다. 그 불만은 공산당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고, 후야호방의 정치 개혁 노선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 덩샤오핑은 경제 개혁을 통해서 중국의 근대화와 강대국 도약을 추진하였지만, 정치 개혁을 할 의사는 없었던 것이다.
[편집] 경과
- 4월 15일 - 후야오방(胡耀邦) 사망과 함께 베이징 시를 중심으로 학생, 시민 시위 시작. 이들은 후야오방의 당 총서기직 해임 이유를 밝힐 것과 그의 명예 회복을 요구.
- 4월 21일 - 경찰과 충돌이 빚어지면서 시위 참여 대학이 10여개로 늘어났고 베이다오(北道)를 주축으로 한 47명의 저명한 학자들이 학생운동 지지 성명 발표.
- 4월 22일 - 후야오방 장례식. 시안(西安)에서 군중들이 10여대의 차량에 불을 지르고 성(省) 정부를 습격하며 공산당 타도 외침.
- 4월 26일 - 최고 실권자 덩샤오핑(鄧小平), 리펑(李鵬) 총리에게 시위 강경 진압 지시. 인민일보는 이 날짜 사설을 통해 학생 시위를 '반혁명 폭동'으로 규정.
- 5월 13일 - 학생 수천명 천안문 광장서 무기한 단식농성 시작. 시위 인원 며칠새 200만명으로 급증.
- 5월 19일 - 자오쯔양, 단식 농성장 방문해 학생들에게 자신이 너무 늦게 온 것에 대해 사과.
- 5월 20일 - 베이징 일부 지역에 계엄령 선포.
- 6월 4일 - 0시 57분. 계엄군 본격적인 진압작전 개시. 중국 정부, 진압과정에서 민간인 300여명이 사망하고 7천여명이 부상했다고 발표. 비공식 집계로는 5천여명 사망, 3만여명 부상이라는 주장도 있음.
[편집] 영향
[편집] 현재
2005년 11월 18일 ‘후야오방 기념대회’를 시점으로, 후진타오 중국 주석이 후야오방 전 총서기의 복권을 조심스레 추진하고 있으나, 여전히 중국에서 천안문 사태를 언급하는 것은 위험한 일로 되어 있다. 후야오방에 대한 재평가는 곧 천안문 사태의 재평가로 이어지기 때문에 쉽게 손을 댈 수 없는 뜨거운 감자이다. 지금도 매년 6월 4일을 전후하여 천안문 광장에는 중국 공안이 대규모로 배치되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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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중국 토막글 | 1989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 | 학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