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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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柳成龍, 1542년 ~ 1607년 5월 13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이자 유학자이며, 동인의 일원이다. 경상도 안동(安東) 풍산현(豊山縣) 출신이며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황해도 관찰사 유중영(柳仲郢)의 둘째 아들이다.
이황의 제자로 조목(趙穆)·김성일(金誠一)과 함께 수학하였으며 성리학의 대가였다. 탁월한 군사지식으로 임진왜란 당시 열세였던 조선의 전세를 역전하여 승리로 이끌었으며, 죽을 때까지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 ‘조선의 5대 명재상(名宰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이순신과는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라 절친한 사이로서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겪은 뼈저린 후회와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현재 대한민국의 국보 제132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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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평가받으며 이황의 문하로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1564년 명종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1566년 별시문과를 거쳐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과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였고, 1569년에는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 왔다. 이때 명나라의 지식인들로부터 ‘서애 선생(西厓先生)’이라 불리우며 존경을 받게 된다. 이후 응교(應敎) 등을 거쳐 경연 검토관(經筵檢討官), 직제학(直提學), 부제학(副提學), 도승지, 대사헌(1582년~1583년), 대제학(大提學) 등의 요직을 맡으며 별탈없이 승진해 나갔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 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좌의정과 이조판서를 겸하다가, 건저 문제(建儲問題)로 정철을 비롯한 서인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동인에 속하여 정철을 처벌하는 데는 찬성하지만 서인 전체를 처벌하는 것에는 반대한다며 강경파인 북인의 일원인 이산해와 대립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영의정 겸 4도 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가 되어 당쟁과 전란 속에서 조선의 조정을 총지휘하게 된다. 선조를 의주로 호종(扈從)하는 한편, 일본의 군사적 도발을 근본적으로 저지하기 위해서는 국방 안보 체제를 제대로 확립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주장을 내세운 뒤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화기 제조, 성곽 수축, 병사 조련 등 군비 확충에 총력을 기울였다. 더불어 여러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순신과 권율 등의 명장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고 파주까지 진격하여 일본군을 궁지로 몰아붙였다.
1598년 명나라 장수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한 그는 조용히 저술에 몰두하였는데, 그 후 2년 만인 1600년에 복권되어 정부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일체 응하지 않았다. 1607년 음력 5월 6일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었을 때, 세상 사람들이 모두들 “유성룡이 아니었다면 우리들은 지금 이렇게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다”라며 애석해 하였다고 한다. 살아 생전 유성룡은 너무나 청렴했던 삶을 살았던 탓으로 장례비가 없었는데 이를 듣고 많은 백성들이 제수용품을 싸들고 문상을 왔다고 한다.
한편, 유성룡은 바둑의 고수로 이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편집] 사후 관작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호계서원(虎溪書院)과 병산서원(屛山書院) 등에 위패가 모셔져 제향하게 되었으며,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져 문충공(文忠公)이 되었다.
[편집] 조선왕조실록의 평가
조선왕조실록에서 사신의 평으로 그의 성품에 대한 단점도 기록되어 있다. 그는 재상으로서의 그릇이 작고 붕당에 대한 마음을 떨치지 못해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면 용납하지 않았고 임금에게 바른 말을 고하지 못하여 대신다운 풍절이 없었다고 한다.[1]
[편집] 읽어보기
- 《징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