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리시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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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시탄(일본어: 吉利支丹, 切支丹, 포르투갈어 cristão(크리스탕)에서 유래)은 막부시대 일본의 가톨릭 신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이들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예수회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으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으며, 일본 메이지 정부에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할때까지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주로 일본에서의 가톨릭 중심지인 나가사키 지역에 집중되었는데, 그 이유는 다이묘들이 가톨릭 교도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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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역사
일본에 가톨릭이 들어온 시기는 1549년이며, 예수회 선교사인 프란시스 자비에르(Francis Xavier)에 의해 들어왔다. 현재 에스파냐 바스크 지역인 나바라 왕국 출신인 그는 프랑스 파리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이냐시오 데 로욜라와 함께 1533년 예수회를 설립하였으며, 인디아 고아에서 전도하였다. 그때 자비에르는 일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무슬림과 유대인이 없는 일본은 선교활동을 하기 좋은 곳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1549년 포르투갈말을 사용할 줄 아는 일본인 통역자의 도움을 받아 전도했는데, 놀랍게도 다이묘들과 서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 이유는 다이묘들에게 그리스도교는 서양문물을 접할 수 있는 통로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에 대한 환영은 잠시동안이었고, 바오로 미키를 위시한 26명의 순교자가 나가사키에서 발생하는 등 탄압의 길을 걷게 되었다. 경쟁국가인 네덜란드에서 온 상인들이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을 식민주의 세력이라고 선동했고, 시마바라 봉기(1638년)라고 불리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저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례로 일본은 네덜란드이외의 유럽국가들과는 거래하지 않았다.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는 선교활동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편집] 조선 기리시탄
기리시탄 가운데 조선 기리시탄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임진왜란때 일본으로 압송된 조선인중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다. 이들에 대해 예수회 선교사들은 "조선인 가톨릭 신자들은 우리가 전한 신덕(信德)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교리교육도 잘 받고 있다"고 평가했다.
[편집] 순교자
- 복자(福者) 고스마 다케야(コスマ竹屋)
- 복자 안토니오(Antonio)
- 복자 가이오(Caio)- 복자 가이오는 나병환자들을 돌보는 평신도 사목을 하였다.
- 복자 권(權) 빈첸시오(Vincentio)- 권 빈첸시오는 예수회 수사였다.
- 복자 가이오 지우에몬(カイオ次右衛門)
- 복자 가스파르 바스(Caspar Va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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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참고문헌
- '일본과 기리시단의 만남',일본 개신교회사/김수정 지음/홍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