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한 (18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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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한(金宗漢, 1844년 ~ 1932년)은 구한말의 관료이며 일제 강점기의 친일파 인사이다. 아호는 유하(游霞).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들은 대개 저항하지 않고 일본 정부가 주는 조선귀족 작위를 받았지만, 김종한은 그 가운데서도 독특한 인물이다.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출세한 관료이면서 고리대금업으로 치부했고, 89세까지 장수하는 가운데 일제의 매판자본으로 커다란 부를 축적했기 때문이다.
김종한은 안동 김씨 가문에서 김계진의 아들로 태어나 김경진에게로 입적되었다. 김경진은 안동 김씨가 세도 정치를 펼칠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인물이며, 김종한은 유명한 친일파인 윤덕영, 윤택영(순종의 장인) 형제에게는 외사촌 형이 된다.
그는 초년에는 개화파에 참가하여 갑오경장 당시 군국기무처 회의원으로서 김홍집의 친일 내각과 함께 개혁을 추진했고, 예조판서, 궁내부대신 등으로 요직을 맡았다. 그러나 자신을 기용해준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고 아관파천으로 친러파가 집권하는 등의 정세 변화에도 변함없이 고위직에 머무르면서 기회주의적인 면모를 보인다.
김종한은 명문 양반가 출신답지 않게 본래 이재(理財)에 밝았다고 하며, 일찍부터 현직 고관이라는 신분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고리대금업으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이러한 자질을 살려 1896년 조선은행, 1903년 한성은행(은행장 이재완)에 참여하여 근대적인 은행업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일본의 금융 자본과 유착하게 되었다.
1909년 일본의 신토를 숭상하는 친일단체 신궁봉교회(神宮奉敎會)를 조직했고, 그해 국민연설회에도 참가했다. 당시 이완용 계열과 이용구 계열은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을 놓고 공로 경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는 이완용 계열에서 활동했다. 이듬해에는 역시 이완용이 조종해 설립한 친일 단체인 정우회(政友會) 총재를 맡았다.
1910년 한일 합방 이후 합방에 협조한 공로를 인정 받아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파 목록에 자신의 작위를 습작 받은 양손자 김세현과 함께 선정되었다.
분류: 1844년 태어남 | 1932년 죽음 | 조선 말기의 정치인 |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