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퓌스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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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와 체포 |
재판과 유죄 판결 |
피카르의 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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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의혹 |
해결 |
알프레드 드레퓌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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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퓌스 사건 (프랑스어 : L'affaire Dreyfus)은 19세기 후반의 수년 동안 프랑스를 양분했던 정치적 추문사건이다.
프랑스 육군의 포병대위였던 유대인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1894년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드레퓌스는 잘못된 증거 자료에 기초를 둔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사실 드레퓌스는 무죄였다. 유대인에 대한 편견이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몰고간 것이다. 당시 고급 장교들은 그들의 실수를 덮으려고 사실을 은폐했으며, 반유대적인 프랑스 가톨릭교회와 보수주의 언론들도 드레퓌스 사건을 침소봉대하여 유대인들을 비난하는 모습을 보였다.
작가 에밀 졸라는 1898년 1월 13일 문학 신문 로로르(L'Aurore, 여명)에 〈나는 고발한다!〉('J'accuse!')라는 제목으로 대통령 페릭스 포레에게 보내는 유명한 공개 편지를 기고함으로써 일반 사회에 그 사건을 폭로한다. 역사학자 바브라 투흐만은 이를 한마디로 '역사상 위대한 소동'의 하나라고 말한다. 에밀졸라를 비롯한 진보적인 지식인들의 프랑스 군부와 정부에 대한 비판, 그리고 피카르 중령의 재조사로 독일에 군사정보를 제공한 진범이 따로 있다는게 밝혀지면서 드레퓌스는 사면복권되어 소령으로 근무했으나 프랑스의 반 유대주의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드레퓌스 사건은 '드레퓌스파'(알프레드 드레퓌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와 '반드레퓌스파'(그를 반대하는 사람들)로 프랑스를 분열시켰으며, 유대인들은 간첩으로 몰리기까지 하자 하느님이 약속했다는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을 건국하겠다는 시오니즘운동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