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온조왕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백제 온조왕 | |
---|---|
[[그림:{{{그림}}}|200px]] | |
재 위 | |
BC 18년 ~ AD 28년 | |
왕 비 | {{{왕비}}} |
황 후 | {{{황후}}} |
왕 후 | {{{왕후}}} |
부 군 | {{{부군}}} |
앞선 왕 | {{{이전 왕}}} |
앞선 황제 | {{{이전 황제}}} |
다음 왕 | 다루왕 |
다음 황제 | {{{다음 황제}}} |
백제의 초대 국왕 |
온조왕(溫祚王, ? - 28년)은 백제의 시조이다. 아버지는 고구려인 우태이며, 어머니는 소서노이다.
[편집] 생애
동명성왕의 적자 유리가 부여에서 고구려로 와 왕태자가 되자 형인 비류와 함께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왔다.
비류는 지금의 인천인 미추홀(彌鄒忽)을 수도로 삼자고 했으나, 온조는 지금의 서울 부근인 하남위례성을 수도로 정하자고 했다.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형제는 결국 서로 헤어져 미추홀과 하남위례성에 각각 나라를 세웠다. 온조는 나라의 이름을 ‘십제(十濟)’라 부르고, 신하 10명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다스렸다.
비류가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살 수 없어 백성들이 십제로 떠나자 자결했고, 온조는 미추홀의 백성들까지 받아들인 뒤 나라의 영토를 넓히고 나라의 이름도 백제로 고쳐 성왕이 남부여로 바꿀 때까지의 국호가 되었다. 이때 본래 성(姓)은 해(解)였으나, 그 계통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이후 부여(扶餘)를 성으로 삼았다. 또 족부(族父:왕의 7촌 형제) 을음을 당시 최고 벼슬인 우보로 삼아 국정과 군사에 관한 일을 맡아 보도록 하였다.
온조는 기원전 16년에 군사를 이끌고 북쪽 국경으로 나아가 말갈족을 무찔렀다. 이어 기원전 11년에는 군사 3천 명을 이끌고 하남위례성을 침입한 말갈족을 대부현(지금의 강원도 평강군)까지 쫓아가 물리친 뒤 500여 명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계속된 말갈족의 침입으로 나라가 어려워지자, 온조는 기원전 5년에 수도를 남한산성으로 옮겼다. 서기 9년, 온조는 마한을 정복하여 영토를 넓혀 백제의 위세를 크게 떨쳤다. 이어 맏아들 다루를 왕태자로 삼고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다. 한편, 옛 마한의 장수 주근이 우곡성을 근거지로 하여 16년에 반란을 일으키자 온조는 친히 군사 5천 명을 이끌고 나가 이를 진압하였다. 서기 21년, 죽은 을음을 대신하여 지식이 풍부한 부여 출신의 해루를 우보에 임명하고, 기원전 2년에 낙랑군의 침입으로 불타버린 하남위례성을 다시 지었다. 온조는 또 나라 안의 여러 요충지에 성을 쌓아 국방의 기초를 닦았다.
백제가 이른 시기에 고대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시조인 온조가 이렇듯 국력을 강화시켜 놓았기 때문이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이 시조 온조설에 입각해 있으나, 백제의 건국에 대해서는 시조 비류설과 시조 구태설 등 다른 설도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온조왕은 9년에 마한을 정복하고 백제의 판도를 세운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 마한을 복속시킨 것은 고이왕 때에 이르러 완전히 끝났다는 것이 정설이다.
[편집] 참고
앞선 왕 없음 |
제 1 대 기원전 18년[1] - 28년 |
다음 왕 다루왕 |
백제의 역대 국왕 |
---|
백제: 온조왕 | 다루왕 | 기루왕 | 개루왕 | 초고왕 | 구수왕 | 사반왕 | 고이왕 | 책계왕 | 분서왕 | 비류왕 | 계왕 | 근초고왕 | 근구수왕 | 침류왕 | 진사왕 | 아신왕 | 전지왕 | 구이신왕 | 비유왕 | 개로왕 | 문주왕 | 삼근왕 | 동성왕 | 무령왕 | 성왕 | 위덕왕 | 혜왕 | 법왕 | 무왕 | 의자왕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