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그레고리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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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오 1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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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그레고리오 1세(라틴어: Sanctus Gregorius Magnus, 이탈리아어: Papa Gregorio I)는 제64대 로마 교황(재위: 590년 9월 3일 - 604년 3월 12일)이다. 라틴 교부의 일원으로 공경을 받으며 중세 교황직의 아버지로 추앙을 받고 있다.
[편집] 생애
로마의 부유한 귀족 고르디아누스(Gordianus)와 실비아(Sylvia)의 아들로 태어남. 두 교황(교황 펠릭스 3세, 교황 아가피토 1세)을 배출한 유명한 가문 출신이었다. 어릴 때부터 신심 깊은 어머니와 두 숙모 에밀리아나(Aemiliana)와 타르실라(Tharsilla)의 영향을 받아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열성적이었다. 부모의 권유로 공직 생활을 하기 위해 법률을 공부하여 570년 공직에 들어가 로마의 지사가 되어 원로원의 의장, 로마의 재정·방어·보급 등 모든 일을 주관하였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그는 책임감과 공무에 대한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그는 수도원 생활을 오랫동안 꿈꿔 왔기 때문에 아버지의 사망 후에 짧은 기간의 공직 생활을 마치고 574년 경에 사저를 수도원으로 개조하고 시칠리아에 6개의 수도원을 세우고 수사가 되었다. 그는 그 곳에서 묵상과 연구에 몰두하였다. 특히 라틴 교부들의 문헌과 성서를 연구하고 고행에 힘썼다. 지나친 고행으로 일생 동안 위장병으로 고생하였다.
그 후 그레고리오는 로마 교황청의 부름을 받아 부제가 된 후 579년 교황청 사절로 비잔티움 제국에 파견되었다. 그리스어는 잘 몰랐으나 해박한 지식과 공식 생활의 경험들이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거기서 그는 대동한 수도자들과 함께 수도 생활에 진력하면서 사람들의 요구에 응하여 욥기에 대하여 많은 강연을 하였는데 후에 그것을 모아 《모랄리아》라는 책을 집필하였다.
586년 로마로 불려와 교황 펠라지오 2세의 고문이 되어 교회의 일을 보게 되었다. 주로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교황 비질리오가 삼장서를 단죄한 이래 이스트리아의 주교들이 로마와 분리되어 있었으므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하였다. 589년 테베레 강의 범람으로 펠라지오 2세가 갑자기 선종하자 590년 그레고리오는 만장 일치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레고리오 1세는 재해를 입은 백성들을 위로하고 3일간 참회 기도를 하였다. 568년 롬바르드족이 침략하여 이탈리아 북쪽에 왕국을 세우고 로마 근처 스폴레토와 베네벤토에 공작령을 세웠다. 그 때까지도 비잔티움 제국에 속해 있던 라벤나는 황제의 총독이 통치하고 있었으나 제국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고 자력도 없었다. 야만족이 로마를 위협하고 있었으므로 그레고리오 1세는 롬바르드의 왕 길루프를 만나 회담을 한 후 거금을 지불하고 해마다 조공을 바치기로 합의한 후 일단 그들의 침입을 막았다. 그러자 로마 시민들로부터 평화의 수호자로 존경을 받았다.
그레고리오 1세의 재산은 이탈리아, 시칠리아, 코르시카, 사르데냐, 갈리아, 아프리카와 일리리쿰에 있는 토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레고리오 1세가 그 토지의 지주였고 수입은 교회의 유지와 필요를 위해 사용되었다. 그레고리오 1세는 재산 관리를 철저히 하여 부정을 막고 막대한 경비를 들여 극빈자들과 자연 재해 및 전쟁 피해자들의 구제를 위하여 사용하였다. 또한 교회법령을 정비하고 무능한 성직자들을 대거 해임시켰으며, 부당하게 박해를 받던 유대인들을 보호해 주었다.
또한 그의 학덕은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800여 통의 서한들 속에 담긴 그의 사상은 로마 가톨릭의 공식 예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유럽의 역사에도 큰 발자국을 남겼다. 그레고리오 1세는 그레고리오 성사 예식서를 만들었다. 그는 '주님, 불쌍히 여기소서'와 '그리스도님, 불쌍히 여기소서'를 주례 사제와 회중이 성가로 응답하게 하고 알렐루야는 참회 시기를 제외하고는 연중 사용하도록 지시하였다. 복음을 창하는 것은 부제에게 위임되었고 강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주님의 기도도 그레고리오 1세의 지시로 현재 미사의 그 자리에 놓이게 되었다. 이 외에도 감사송 등 여러 가지 기도문도 그레고리오 1세의 업적이었다.
그레고리오 1세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요안네스 4세가 자신을 '세계총대주교'라고 칭하자 자신을 "하느님의 종들 중의 종"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교황권이 교회의 최고 권위임을 재확립하였다. 후대 교황들도 이 칭호를 즐겨 사용하였다. 이 뜻은 교황청은 모든 교회들의 우두머리이며 전체 교회의 관심과 수위권이 성 베드로의 후계자에게 위임되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교황은 신앙의 머리이다. 그래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도 로마의 교황좌에 예속되어 있으며 예속되어 있지 않은 주교는 없다. 로마의 교황좌는 모든 교회들 위에 세워져 있으며 각 교구는 각 지역에서 사목권을 유지하나 형제 주교들은 로마의 교황과 연결되어 있다.
그레고리오 1세는 로마의 주교로서 로마에서부터 토스카나 남부에 이르는 교회의 모든 활동을 총괄하였다. 또한 그레고리오 1세는 주교의 선출을 법적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권리를 보호해 주었으며 궁핍할 때 지원해 주었다. 주교에 대한 고발은 로마에서 직접 재판하였다.
그레고리오 1세는 아프리카 교회에 대해서는 특별히 도나티즘의 경고를 주지시켰다. 아리우스파인 비시고트족이 개종하여 정통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다. 에스파냐의 교회와 좋은 관계를 맺고 593년 아를의 교회와 관계를 정상화시켜 프랑크 왕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레고리오 1세는 영국에 많은 관심을 보여 597년 성 안드레아 수도원의 수사들을 영국에 파견하였다.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동료 수사 40명은 영국 교회의 창시자들이 되었다. 영국은 2개의 대주교좌와 12개의 작은 교구를 두고 캔터베리 교구를 수좌 교구로 정하였다.
그레고리오 1세는 저술가로도 명성이 높았다. 이론적인 면보다는 신앙 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제적인 면을 많이 다루었다. 복음에 관한 강론 40개와 에제키엘서에 관한 강론 20개 그리고 아가에 관한 강론은 특히 유명하다.
그레고리오 1세의 사목적인 열성은 대단하였다. 교황이 된 후 사목직에 대한 바로 작업을 시작한 《사목적 규범서》는 네 부분으로 되어 있다. 사목직에 맞는 인물과 사목에 대한 올바른 동기, 사목자의 덕성, 다양한 사람들에게 하는 강론, 사목자가 빗나가지 않도록 양심 성찰을 규정하고 있다. 수도자들을 위해서는 성 베네딕토의 규칙서가 있었던 것처럼 주교와 신부를 위해서는 교황의 사목 지침서가 있었다. 그레고리오 1세는 《대화집》도 기록하였다. 593년에서 594년에 걸쳐 저술한 이 책은 이탈리아 교부들의 생애와 기적 그리고 영혼의 불멸에 관한 것이었다.
그레고리오 1세의 서한을 모은 14권의 책은 그의 재위 중에 일어난 거의 모든 일들이 수록되어 있어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이다. 이 외에도 그레고리오 1세는 문화와 예술 면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그레고리오 성가는 종래의 모든 성가를 수정하여 보급시켰는데 자연스럽고 단순하며 평음이면서도 장엄한 종교적 정서를 잘 드러내는 음악으로 호평을 받아 왔으며 로마 가톨릭의 공식 성가로 인정되었다.
선종 즉시 성인으로 시성되어 '대교황'의 칭호를 받았다.
전 임 펠라지오 2세 |
제64대 교황 590년 9월 3일 - 604년 3월 12일 |
후 임 사비니아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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