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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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尹致昊, 1865년 1월 16일 ~ 1945년 12월 9일)는 한국의 정치가이다. 본관은 해평, 호는 좌옹(佐翁)이다. 창씨명은 이토 치카우(伊東致昊)이다.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1896년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했다. 1908년 현재의 송도고등학교와 송도중학교의 전신인 한영서원을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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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초기 개화파 시절
윤치호는 1881년 17세 때 신사유람단 조사(朝士)였던 어윤중(魚允中)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한국 최초의 동경 유학생의 한 사람이 되어 개화사상을 수용하였다. 또 1884년의 갑신정변 때는 개화당의 일원으로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위해 활동하였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윤치호는 10여 년 간 중국과 미국으로 망명·유학하여 서구 민권사상과 기독교 신앙을 수용했으며, 독립협회 운동이 절정기에 달한 1898년 경에는 독립협회 회장, 《독립신문》 주필 그리고 만민공동회의 최고 지도자로서 민권운동과 참정·개혁운동을 정력적으로 지도했고, 실력양성운동에 진력하였다. [1] 1898년 11월 23일, 12월 15일-12월 22일, 한성판윤을 역임하였다.[2]
그의 실력 양성론은 후일 독립운동 세력 내부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 독립운동 세력은 김좌진, 홍범도같은 무력 투쟁파와,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외교활동이 큰 축을 이루고 있었고, 양자 사이에서 민족의 실력을 키워야 뭐든 해도 된다는 집단이 존재했다. 이들 제3그룹은 주로 만주와 연해주를 중심으로 경제 자립 기반 확보와, 교육 활동 및 신흥무관학교와 같은 무관 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윤치호는 개화기 시절부터 패배주의적 사고방식에 젖어 있었고, 그것이 결국 그가 친일파로 변절(전향)하는데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편집] 친일파로 전향
1911년 105인 사건 때 민족주의자로서 일제에 의해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15년에 윤치호는 친일로 전향했다. 윤치호가 친일 전향을 조건으로 1915년 2월 13일 특사로 출감한 후 매일신보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친일 의사를 내비쳤다.(인터뷰 내용은 위키인용집참조)
윤치호의 아버지인 윤웅렬 역시 1880년부터 근대화를 위해 친일 성향을 띠기 시작했다. 이 성향은 특히 그가 1882년에 발생한 임오군란 후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윤치호는 청일전쟁 후 들어선 김홍집 내각에서 군부대신을 지내기도 했다. 1910년, 일제의 조선 강점 이후 일본으로부터 남작 작위와 공채 2만 5000원을 받기도 했다.
3·1 운동 당시, 국민대표로 서명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했고, 3월 7일 기자 회견을 통해 다음과 같은 담화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 “강자와 서로 화합하고 서로 아껴 가는 데에는 약자가 항상 순종해야만 강자에게 애호심을 불러일으키게 해서 평화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입니다마는, 만약 약자가 강자에 대해서 무턱대고 대든다면 강자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약자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됩니다. 그런 뜻에서도 조선은 내지에 대해서 그저 덮어 놓고 불온한 언동을 부리는 것은 이로운 일이 못됩니다.” (경성일보 1919년 3월 7일)
이 상황에 대해서, 일부 학자는 그 당시에, 윤치호가 '독립이 불가능하며 일제에 저항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일기에도 "나는 국경일에 일장기를 게양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본의 통치하에 있는 한 우리는 그 통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윤치호 일기, 1919년 10월 1일)라고 썼다.
[편집] 1920년대 친일 활동
[편집] 1930년대 친일 활동
[편집] 1940년대 친일 활동
[편집] 광복과 죽음
[편집] 사소한 것
1890년대 미국에서 돌아와 한국에 자전거를 처음 소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본인이 타고 다녔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3]
[편집] 죽음 이후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파 목록에 선정되었다.
[편집] 가족 관계
- 아버지: 윤웅렬(尹雄烈, 1840년 4월 17일 - 1911년 9월 22일)
- 첫째 아들: 윤영선(尹永善, 1896년 12월 25일 - 1988년 2월 6일) 제3대 농림부장관
- 둘째 아들: 윤광선(尹光善) 한국 전쟁때 납북. 남궁억의 사위.
- 셋째 아들: 윤장선(尹璋善) 전(前) 미국 샌프란스시코 총영사관
- 넷째 아들: 윤기선(尹琦善) 미국에서 피아니스트 활동
- 다섯째 아들: 윤정선(尹挺善) 미국에 있음.
- 첫째 딸: 윤봉희- 김긍성과 결혼. 개성에서 살았음.
- 둘째 딸: 윤용희- 외국 거주.
- 셋째 딸: 윤문희- 정광현(鄭光鉉, 서울대학교 법대 교수)과 결혼.
- 넷째 딸: 윤은희- 정봉섭(의학박사)과 결혼.
- 다섯째 딸: 윤명희- 조인호와 결혼.
- 여섯째 딸: 윤보희- 이화여자대학교 음대 교수. 현영학(이화여자대학교 문리대학장)과 결혼.
- 일곱째 딸: 윤영희- 미국 거주.[4]
[편집]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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