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니시 유키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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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시 유키나가(일본어: 小西行長, こにし ゆきなが, 1555년? - 1600년 11월 6일)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장수였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끼던 장수였다. 당시 대조선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대마도주 소오 요시도시의 장인이자 가토 기요마사와 앙숙 관계였다.
[편집] 생애
본래 사까이 출신의 약재 무역상의 아들로 그 자신도 상인이었다. 본명은 고니시 야구로였다고 한다. 그러나 용기와 수완을 인정받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발탁되었다. 발탁 후 도요토미로부터 봉토를 하사받았는데, 오늘날 구마모토 일대의 남쪽으로 우토성(宇土城) 일대로부터 섬 지역 아마쿠사(天草) 제도까지 였다. 북쪽은 가토 기요마사에게 할당되었고, 가토 기요마사는 구마모토 성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인 고니시는 군기로 붉은 비단 장막에 하얀색 십자가를 그린 것을 사용했고, 그의 휘하 병사들 다수도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 그가 조선을 침략했을 때 그의 진중에는 포르투갈 로마 가톨릭 신부인 세스페데스가 사목했었고, 밤마다 미사를 올렸다고 한다. 그의 봉토였던 아마쿠사 제도는 '그리스도의 섬'이라고 불릴 정도였는데, 후에 시마바라 봉기의 진원지가 된다.
도요토미의 조선 침략 야욕을 감지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나름대로 전쟁을 막고자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자 가토 기요마사에게 보란 듯이 18,700명으로 구성된 조선 침공 제 1군의 지휘관으로 선봉대로 가장 먼저 조선에 상륙, 부산진성과 다대포진성, 동래성을 함락하고 서울을 가장 먼저 점령하였고, 평양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평양성 함락 이후 보급 문제(이순신의 남해 제해권 장악으로 인함)로 더 이상 진격을 못하고 지체하던 중 조명연합군에 쫓겨났다.
정유재란 시 다시 참전하나 1598년 8월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후퇴하였다. 후퇴를 위한 노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수치심을 안고 본국으로 도망친다. 패전의 수치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후퇴한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때문이었다. 히데요시가 5월에 병 들어 8월에 죽었는데, 9월부터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지지하는 도요토미파에 대해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이 내전은 조선에 있던 일본군이 모두 퇴각한 것이 10월이었는데 그 빈틈을 이용한 것이었다. 그들이 다 돌아오기 전에 이에야스는 자신이 일본의 새로운 패권자로서 지위를 확고히 하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 이에야스는 임진왜란 때 치안을 이유로 한 명의 병사도 보내지 않으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1600년 10월의 세키가하라 전투는 도요토미 파와 도쿠가와 파간의 마지막 싸움이었다. 이 때 가토 기요마사는 도요토미의 측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요토미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 편인 서군(西軍)에 서지 않고 신흥 세력 도쿠가와의 동군(東軍)에 섰다. 하지만 고니시는 도요토미의 편에 섰으며, 도쿠가와에게는 등을 돌렸다.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는 서군의 패배로 끝났고, 여기서 패한 고니시는 1600년 교토 로쿠죠(六條)의 강변에서 온갖 수모를 당한 끝에 참수형을 당했다. 고니시는 자살은 로마 가톨릭에서 금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할복을 거부하고, 참수형을 선택했다고 한다. 고니시의 봉토도 가토에게 빼앗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