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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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해전 (임진왜란의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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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조선, 명나라 | 일본 | ||
지휘관 | |||
이순신, 진린 | 고니시 유키나가(순천) 소 요시토시(사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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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전선 150여척 | 전선 500여척 | ||
피해 상황 | |||
이순신 및 조선군 270명 사상, 명군 500여명 사상 | 전선 450여척 격침, 48,000명 사상. |
노량해전(露梁海戰)은 임진왜란 당시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이순신이 이끈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 함대가 노량진 앞바다에서 일본의 함대와 싸워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서 왜란의 마지막 해전이며, 이순신이 전사한 해전이기도 하다.
[편집] 경과
행주산성에서의 패배와 수군의 잇다른 패배 그리고 명나라의 참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진 일본군은 휴전을 제의하고 자국으로 철군했다가 휴전 협상이 결렬되자 1597년에 15만 대군을 동원하여 조선을 다시 침공했다. 이것이 정유재란(丁酉再亂)이다.
그러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임명하여 전세를 가다듬은 조선 수군이 명량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 도독 유정과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의 참전으로 남부 해상권이 조선-명나라 연합군에게 다시 넘어가게 되자, 해상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당한 일본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다 이듬해인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까지 급사하고,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조선 주둔 일본군의 수뇌부는 난관에 빠지게 된다. 계속되는 패전으로 병사들의 사기는 계속 저하되어 가고 있었고, 조선 수군에게 해상 보급로를 차단당한 채 겨울을 맞이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었으며, 고니시 유키나카 등 조선에 출병했던 일본군 장수들 대부분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들이었으므로 히데요시가 죽은 후 정권을 잡게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신경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일본군은 서둘러 전쟁을 끝내고 자국으로의 철군을 결정하고 순천 등지로 집결하며 철수를 서둘렀다.
이에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명나라의 병력과 함께 순천 왜교(倭橋)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카의 부대를 공격한다. 이것이 ‘순천왜교전투’이다. 6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큰 전과를 세운 조선 수군은 일단 고금도로 귀환한 후, 고니시 유키나카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고니시의 병력은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사천에 주둔 중이던 시마즈 요시히로와 고성에 주둔 중이던 다지바나 등은 고니시 유키나카의 부대를 구출하고 본국으로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1598년 11월 18일 수군 6만여 명과 3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노량으로 향했다.
그러나 시마즈 요시히로의 함대가 노량을 통과할 것을 예측한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으로 하여금 남해도 서북쪽 죽도 뒷편에서 일본 수군의 퇴로를 차단해줄 것을 요청하고, 자신의 조선 수군은 일단 봉쇄망을 푼 후, 11월 18일 오후 10시경, 남해도 서북단인 관음포(觀音浦)에 매복시켰다.
11월 19일 새벽 4시경, 시마즈 등이 이끄는 일본 함선 300여척이 노량에 진입하자 매복해있던 이순신의 조선 함선들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고, 이후 왜교 포구를 나선 고니시의 일본 수군과 진린의 명나라 수군이 합세하여 4시간여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11월 19일 오전 8시경, 전투는 막바지에 이르고 이미 200여척 이상이 분파되어 패색이 짙어진 일본 수군은 잔선 100여 척을 이끌고 퇴각하기 시작했으며, 조선-명나라 연합함대는 오후 12시경까지 잔적을 소탕하며 추격을 계속하였다. 도주하는 일본 함대를 추격하던 이순신은 관음포에서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면서, "싸움이 한창 중이니 나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으며, 가리포첨사 이영남·박안군수 방덕룡·흥양현감 고득장 등과 명나라 수군 부총병 등자룡 역시 추격 도중 전사하였다(이 때 도주하던 100여척의 일본 함선 중 50여 척을 분파하니 겨우 50여 척의 패잔선만이 도주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왜교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의 군사들은 노량해전의 혼란을 틈타 남해도 남쪽을 지나 퇴각하여 시마즈의 왜군과 함께 부산에 집결, 퇴각하였으며 이 노량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이 막을 내리고, 7년 간의 긴 전쟁도 끝이 났다.
[편집] 평가
노량해전이 이순신의 마지막 전투이자 극적인 임종 과정으로 유명해졌지만, 전략적 관점에서는 조선-명나라 연합군의 실패이고, 일본군 입장에서는 성공한 작전이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이 전투의 목적은 조선-명나라 연합군의 입장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순천의 일본군이 일본으로 탈출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으나, 고니시는 조선군이 주변에서 몰려온 지원 병력과 싸우는 틈을 타서 도망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즉, 조선의 입장에서는 200여 척의 일본 전선을 격침시켰지만, 전투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절반의 성공"이라 할 것이며, 일본의 입장에서는 많은 피해를 입긴 했으나 철수에는 성공했기 때문에 또한 "절반의 성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는 일본이 전투에 지고 전략에서는 승리했다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은 조선-명나라 연합군의 공조가 그리 긴밀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결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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