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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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金日成, 1912년 4월 15일 - 1994년 7월 8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이었다.
그의 이력에 대해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다른 나라의 역사관이 첨예하게 대립되는데, 이는 북조선 측으로서는 그의 이력에 대한 신화화가 주체사상의 수령론의 중요한 근거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군부독재 기간에 대한민국에서는 김일성 주석이 가짜라는 "김일성 가짜설" 이 퍼져 각각 그에 대한 평가가 달랐으나, 백발의 김일성인 나주의 김광석과 청년 김일성인 김성주는 각각 다른 지방에서 활동한 동명이인의 항일혁명운동가로 밝혀졌다.[출처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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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어린시절과 항일운동시기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에 평양 만경대리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은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북조선측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1925년 중국 길림으로 가, 1926년 ㅌ.ㄷ(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시작했다. 그의 무장투쟁은 1937년부터 1940년 사이에 절정을 이루었으며, 1937년 6월에 있었던 소규모의 보천보 전투가 최고 성과로 간주된다. 보통 약 100명 정도를 거느리고 무장투쟁을 했다고 한다. 그런 유격전으로 김일성의 이름이 퍼지게 되었고 그의 항일투쟁은 때때로 조선의 신문에 소개되기도 했다. 또한 김일성은 조선공산당의 붕괴를 초래한 원인으로 교조주의를 혹독히 비판하고 하나의 통일된 운동으로 조직적인 투쟁을 할 것을 제시했다.
실질적으로 김일성은 중국의 만주지역 항일조직인 동북인민혁명군에서 항일투쟁을 하다가 1940년 소비에트 연방령 하바롭스크로 떠나 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여단의 대위가 되어 5년간의 교육을 받았다. 김일성의 항일투쟁조직이 얼마나 독립적이었는가는 논란의 대상이다.
[편집] 조국광복시기
1945년 9월 19일, 김일성 등 조선인 항일유격대원들이 원산항을 통해 귀국, 사흘 후인 22일 평양에 도착했다. 당시 소련 군정에 의해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서 7만여 명의 군중이 참여한 가운데 '조선해방축하집회'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김일성이 "김일성 장군"으로 평양 시민들에게 소개되면서 정치활동이 시작되었다. 김일성은 해방 후의 한국에서 정치 기반이 전혀 없었으나 소련 군정의 도움을 받아 1946년 2월 8일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어 사회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편집] 공화국정부 수립과 한국전쟁시기
김일성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내각수상이 되고, 국가강령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강령"을 발표한다. 이 강령의 내용은 남녀평등과 선거권실시, 무상교육제도(북조선에서는 11년무상교육제를 뜻한다.) 실시와 무상의료제도 실시, 친일파·지주 청산과 토지개혁실시, 자원의 공동생산과 공동소유를 주장하고 있다. 1949년 남북 로동당을 합당하여 조선로동당을 결성하여 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49년에 독립운동가 김구를 만나, 평양직할시 쑥섬(강나도)에서 남북연석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김구의 주장과 북조선의 단독정부를 세우자는 김일성의 주장이 서로 달라서 결국 회의는 해결책을 찾지못한 채 중단되었다. 1950년 3월에는 박헌영 당시 조선공산당 총비서와 허가이 조선노동당 책임비서와 함께 소련으로 물자원조와 무기공급을 요청하기 위해 방문했다.
결국 김일성은 1950년 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한국전쟁를 일으켰으나 대한민국 국군과 UN군에 막혀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하였다.
[편집] 전후복구시기
1953년 2월 8일 인민군 창건 5주년에 김일성은 공화국 최초의 원수가 되어 '김일성 장군'에서 '김일성 원수'로 불리게 되었고, 1953년 7월 28일 공화국 영웅 칭호와 국기훈장 제일급을 수여받았다.[1] 그 때부터 박헌영의 남로당파, 김두봉의 연안파, 허가이의 소련파를 숙청하여 권력체제를 구축하였다. 1960년대 초반부터 주체사상을 국가이념으로 정착시키며 중국·소련에 대한 자주노선을 선언하였다. 한국전쟁으로 대규모의 산업시설과 교통시설, 그리고 복지시설이 모두 파괴되자 산업시설들을 복원하기 위해 전후복구사업인 천리마운동을 1957년에 처음으로 실시했으며, 항운교통의 중심인 남포항을 현대적인 시설들을 갖추고, 소련의 원조를 통해 계획경제를 받아들였다. 그는 제2세계 간 외교에서 크게 벗어나서 제1세계와 제3세계 국가 간의 폭 넓은 외교활동을 실시하였으며, 국민들의 계몽을 통한 문맹퇴치운동을 실시, 평양직할시를 공식적인 수도로 지정할 것을 결정하였다.
1970년 당 중앙위원회 총비서가 되었다.
1971년 8월 6일 캄보디아의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를 환영하는 평양 대규모 집회에서 "우리는 언제든지 집권여당인 민주공화당을 포함한 남조선의 전(全) 정당, 사회단체, 개별인사들과 만날 용의가 있다."고 천명하였다.
1972년 헌법개정으로 국가권력구조를 국가주석중심체제로 바꾼 다음 국가주석·국방위원회위원장에 취임하였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통해 남북 문제를 논의하였으며, 1980년 남북통일방안으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안>을 제안하였다.
[편집] 만년
김일성은 1990년 국가주석에 재추대되고, 1992년 대원수 칭호를 받았다. 회고록 편집과 외교문제에 집중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그의 회고록《세기와 더불어》가 출판되어 나온다. 1993년에는 국방위원장직을 김정일에게 이양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1994년 6월 카터 전 미국대통령 면담 때 남북정상회담을 제안, 회담준비가 진행되던 중 7월 8일 새벽 2시에 평양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였다. 사망하기 전 북조선 지도부에게 유언을 남겼는데, 이 "유언"은 지금 북조선 정치체제의 영향을 주고 있다.
그의 공식 사망 장소는 평양이지만, 묘향산 향산초대소에서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이 설이 제기된 배경에는 김일성이 병요양을 하려 향산초대소에 머물다가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에 그 이후로 그의 아들 김정일이 향산초대소를 가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남북정상회담 성사 직전의 상황과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하여 김정일에의한 암살 내지는 사망 방조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아직도 그의 죽음은 여러가지 이야기와 함께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편집] 추모행사
김일성이 사망한 후 평양에서는 대규모 추모행사가 벌어진다. 이 추모행사는 5년과 10년을 번갈아가며 진행되며,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북조선은 김일성의 사망을 애도하기 위해 1997년에 평양 모란봉구역에 대형 추모탑을 세워놓고, 지방도시에 1개 씩 세웠다. 그리고 김일성이 태어난 날을 "태양절"이라고 부르도록 했으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강령을 통하여 "김일성 주석이 탄생한 1912년 4월 15일부터 '주체연호'를 사용한다."고 했다.
1997년부터 김정일 국방위원회 위원장은 이른바 "수령 우상화 정책"을 펼쳐 김일성이 생전에 살았던 금수산의사당을 확장하여 금수산기념궁전으로 부르도록 하고, 김일성 주석의 생일을 맞이하여 4월의 봄 예술축전대회를 개최하고, 김일성의 동상을 지방에 세웠다. 김일성이 생전에 말하기를 "만약 내가 죽는다면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묻히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하였으나, 그의 유언과는 반대로 돌아갔다. 김일성의 주검은 방부 처리가 되어 금수산기념궁전에 있는 유리관에 안치되어 있다.
[편집] 성격
김일성은 시와 노래를 좋아해서, 그가 지은 노래와 시가 몇 십 편에 이른다. 가장 유명한 노래는 "조선의 노래"이다. 이 노래는 일제 시대 때 동북인민혁명군에 의해 불러진 것을 1993년에 보천보전자악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수 전혜영이 다시 복원했다. 그가 좋아하는 노래는 "사향가"와 "자장가"이다. 사향가는 내용이 고향에 대해 묘사한 것으로서, 그의 외조모인 이보익의 애창가였다. 김정일도 어린 시절에 그녀가 부르는 사향가를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김일성은 김정일의 50돌의 생일을 맞이하여 "백두광명성찬가"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이 시는 한문으로 지어졌고, 량강도 삼지연군에 화강암 비석에 세겨져 있다.
그는 서예활동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북조선의 공공건물에는 김일성의 친필이 있는 간판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김일성의 친필비는 황해북도 개성시에 있으며, 주민들이 살고있는 주택에도 현판을 제작해서 나누어주기도 했다. 김일성의 친필이 걸려있는 건물로는 "대동강여관"과 "김형직사범대학", 그리고 북조선의 종합대학인 "김책공업종합대학" 등이 있다.
[편집] 평가
김일성에 대한 세계 각국의 언론은 다양하게 평가하고 있다. 서방 국가는 그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가 많고, 소련이 포함되는 제2세계와 비동맹주의 국가가 포함되는 제3세계, 특히 미국에 적대적인 제3세계 국가들은 대부분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긍정적인 평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다. 그는 이민위천의 정신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민위천의 정신은 "인민을 먼저 사랑하고 돕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북조선에서 대한민국으로 망명한 황장엽과 독일의 소설가 루이제 린저는 김일성과 가깝게 지냈던 지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들은 김일성이 북조선 인민들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밝힌 바 있다. 김일성은 북조선의 경제발전을 위해 산업화와 공업화에 관심이 가지고 관련된 정책들을 입안했다. 1956년에 남포시에 있는 제철공장 방문한 후 천리마운동을 실시하였다. 천리마운동 기간에는 공업 현대화가 진행되고 남포항과 평양역 같은 산업교통시설이 복원되었다. 그리고 지방 여러 곳에 발전소가 세워지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조선 경제에서 공업의 비율이 70퍼센트를 차지했을 만큼 놀라운 공업발전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조선은 1990년대 중국과 나란한 발전된 공업국가에서 생활수준이 낙후된 농업국가가 되었다.
그의 또한 항일운동에도 이바지했다. 1937년에 보천보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비롯해서, 일제 시대 동안 동북인민혁명군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그의 대한 비판이 만만치 않은 가운데, 그가 일으킨 보천보전투에 대한 평가를 다시 내리고 있다.
부정적인 평가는 다음과 같다. 김일성은 인권을 말살하는 스탈린주의를 엄격하게 고수했고, 이를 유교사상과 섞어 주체사상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창시했다. 이렇게 창시된 주체사상은 북조선 인민들의 사상과 자유를 침해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또한 경제적으로 공업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농산물의 값이 폭등하고, 무차별식으로 계단식 논밭을 무리하게 개간해서 식량생산의 자급율을 떨어트리는 등 농업의 낙후화를 가져왔다. 정치적으로는 자신의 아들인 김정일을 후계자로 삼는 것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민족에게 큰 비극을 안겨준 한국전쟁을 일으킨 그의 결정은 가장 큰 비판을 받고 있다.
[편집] 출처
-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의 기관지 《조선신보》.
- 《조선일보》와 자매지 《월간조선》(2005년 7월).
- 고등학교 2학년용《한국 근현대사》.
-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항일혁명편
[편집] 같이 보기
[편집] 바깥고리
[편집] 각주
- ↑ 서동만,〈한국전쟁과 김일성〉《역사비평》제51호(2000년 여름) 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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