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상파괴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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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상파괴운동(聖像-)이란 8-9세기 동방 정교회에서 성상(이콘) 공경이 금지되고 성상을 파괴한 운동이다. 이는 비잔티움 제국을 양분시켜 내전을 초래하였으며 로마 교황청은 이를 비난하고 성상파괴논쟁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비잔티움 황제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교황청에 좋은 명분을 제공하였으며, 다른 요인들과 함께 결국 동서 로마교회의 분열, 즉 기독교가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으로 서로 갈라서는 최초의 교회 분열로 이어졌다.
목차 |
[편집] 경과
[편집] 운동의 시작
730년 시리아 출신의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레온 3세는 성상의 숭배를 금하는 칙령을(성상금지령)을 발하였다. 이에는 구약의 모세의 십계에 열거되어 있는 "우상을 짓지 말라"가 근거로서 원용되었다. 그러나 이 칙령은 제국의 소 아시아 부분과 일부의 성직자, 지식인에게는 지지를 받았으나 고대 그리스 문화의 전통이 남아 있는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제국의 유럽 부분은 제국민들의 반발이 심하여 문화적, 정치적인 문제도 수반되어 제국을 2분시키는 대논쟁이 되었다. 제국의 유럽 부분에서는 반란도 일어났다. 이 대립은 원래 오리엔트 종교였던 기독교가 그리스화해 가는 중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레온 3세가 이 시기에 성상금지령을 발한 이유는 확실하지는 않다. 성상에 대한 공경이 부활한 후 성상파괴파의 저작 등은 이단 문서라는 이유로 파괴되었고 현대에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레온 3세의 시대보다 이전으로부터 성상숭배에 대한 의문과 비판은 나왔는데 그 외에도 화산의 분화 등과 같은 천재지변, 우상을 부정하는 이슬람교로부터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 등이 요인으로서 들어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 정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레온 3세의 아들 콘스탄티노스 5세는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가차없이 탄압, 처형하였으나 논쟁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편집] 서로마교회의 반발
한편 성상을 게르만족에 대한 포교에 이용한 서로마 교회가 이 결정을 비난함과 동시에 그때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내던 세금의 납부를 중지했고, 이로 인해 동서교회의 대립이 결정적으로 되었다. 서로마교회 입장에서는 게르만족에게 지금까지 포교 활동의 경험상 무언가를 보여주며 전도하지 않고서는 게르만족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무언가를 보여줘야 했고, 그것이 성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로마 교회의 반대는 단순히 게르만족에 대한 포교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 문제는 명분에 지나지 않았으며, 실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서로마교회는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한 이래 기독교의 정통은 로마에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로마는 로마 제국의 발상지로서 오랜동안 중심지이기도 했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 1세가 수도를 옮긴 후 동로마제국은 게르만족에게 유린당한 로마보다 정치적으로 우위에 있었으며, 그들의 보호를 자처하면서 로마를 게르만족으로부터 보호해준다는 이유로 지속적으로 간섭하고 규제하고 있었다. 서로마교회는 이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동로마제국 황제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나, 특별한 명분과 실질적으로 자신들을 후원해줄 후원자가 없었다. 레오 3세의 성상파괴령은 그들에겐 명분을 제공해주었던 것이다. 새로운 후원자는 메로빙거 왕조를 무너뜨린 프랑크 왕국의 피핀이 프랑크 왕국의 왕위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새로운 후원자가 되었던 것이다. (자세한 것은 교회의 대분열과 프랑크 왕국 참조).
[편집] 결과
결국 787년에 콘스탄티노스 5세의 아들 레온 4세의 황후 이레네가 주재한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 의하여 성상공경의 정통성이 재확인되었다.
그 후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815년에도 다시 성상금지령이 발해져서 843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미 소아시아 축에서도 성상파괴에로의 지지는 저하하여 큰 운동은 되지 못하고 결국 성상공경이라는 신앙전통이 부활하였다.
하지만 가장 큰 결과는 교회가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으로 분리되는 최초의 분열로 두 조각이 났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