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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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대학살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 독일이 유대인들을 전멸시키려는 목적으로 자행하였다. 영어로는 보통 홀로코스트(Holocaust), 히브리어로는 쇼아(Shoa, השואה)라고 하는데, 구약성서의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를 가리키는 단어들이기도 하다. 나치독일은 유대인외에도 공산주의자, 동성연애자들, 집시, 정신박약장애인을 포함한 장애인, 소련의 전쟁포로들 등 여러 ‘원치 않는 부류’들을 유대인들과 함께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들은 대부분 집단수용소에 옮겨져 조직적으로 학살되었으며, 장애인의 경우는 의사들에 의해 안락사시키는 방법으로 5만명이나 학살했다. 정확한 피해자 수는 집계되지 않았지만 대개 수백만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홀로코스트 못지 않은 학살 사건이 역사적으로 수도 없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대량학살의 대명사로 남아 있는 것은 짧은 기간 동안에 전쟁의 와중에서도 거의 모든 국가기관을 총동원하여 과학적인 방법으로 수많은 사람을 학살하였기 때문이다. 숫자는 600만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600만이 죽은 것은 아니다. 600만 중 400만이 죽은 것으로 알려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실제로 죽은 사람은 150만 ~ 200만이며, 그들 모두가 유대인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숫자 조작이 이루어진 것은 전후(戰後)의 이야기로서 숫자야 어떻든 수백만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히틀러와 NSDAP가 왜 이렇게 많은 유대인을 학살했는지에 대해서는 단지 히틀러가 내세운 "반유태주의" 때문이라고만 사람들은 알고 있다. 히틀러가 반유태주의자가 된 이유에는 참 다양한 요인들이 설명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심리학까지 동원되고, 어머니가 어느 유대인의 정부였다는 이야기도 공공연히 회자된다.
그러나 히틀러는 현실적인 권력을 지향하는 정치인이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참호전의 경험은 단순한 몽상이나 이상주의보다 현실적인 생존에 대한 욕구와 그럴 수 있는 능력을 요구했다. 그런 사람이 단지 어머니의 정부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떄문에 반유태주의자가 되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히틀러의 반유태주의와 극우 민족주의는 청년 시절에 실업자로 빈(Wien)을 헤메던 시절에 형성된 것이다.
목차 |
[편집] 배경
[편집] 정치적 배경
히틀러와 NSDAP가 반유태주의를 내세운 것은 정당 창립때부터였다. 반사회주의, 반공산주의, 반유태주의를 기치로 내건 NSDAP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두려워한 자본가, 사회에 대한 불만이 가득한 실업자등의 지지자들을 보수적인 바이에른의 주도 뮌헨에서 시작했다. 지지자들을 긁어모으고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독일 국민들의 관심을 NSDAP로 모아야 할 필요가 있었고, 정권 장악 후에는 그 연장 선상에서 독재 정권의 기반을 든든히 다져야 했다. 흔히 히틀러의 권력 장악이 가능했던 이유로, 제1차 세계 대전의 패배와 굴욕적인 베르사이유 조약에 대한 분노, 그리고 경제공황이 제시되곤 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히틀러가 그 충격과 굴욕감을 결집시켜 구체적인 권력으로 바꿔나갔다는 것이다. 1차대전 패배의 충격과, 굴욕적인 베르사이유 조약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분노를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야 했다. 분노를 결집하여 새로운 목표를 제시하고 그 목표를 이루어 분노와 굴욕의 대상을 제거하자는 논리와 행동이 필요한데, 히틀러는 그것을 제시한 셈이었다(다른 대부분의 정당들은 실패했었다).
우선 먼저 필요한 것은 그런 굴욕을 왜 겪어야 했는가였다. 원인을 알아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동원된 논리가 ‘등 뒤의 비수’이다. 이 논리는 우파세력이 만들어낸 신화로, 1차대전에서 패배하고 베르사이유 조약의 굴욕을 겪은 것은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전선에서 영웅적으로 싸우고 있는 군부를 배신한 결과라는 것이다. 실제로 연합군은 휴전 당일까지도 독일 영토에는 거의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파들의‘등 뒤의 비수’논리는 완전히 날조된 논리였다. 이는 1918년 여름 이후에 에리히 루덴도르프를 위시한 군부 실세가 황제에게 휴전-사실상의 항복-을 제의한 사실은 일체 알려지지 않았고, 군부가 자진해서 좌파정당인 독일 사회민주당(SPD)에게 권력을 내준 것도 알려지지 않았다. 사실 SPD는 군부가 휴지버리듯이 버리는 권력을 받아 휴전조약(사실상 항복)에 서명하여 국내의 엄청난 반발을 사느냐, 아니면 어떻게든 권력을 잡아 그들의 이상을 실현하는 호기로 삼냐는 의견 사이에서 갈등 끝에 후자를 선택하였던 것이다(이는 이후 SPD의 어정쩡한 행보와 좌파분열의 배경이기도 하다). 만일 SPD가 그 제의를 거부했다면, 우파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설 것을 우려했다. SPD로서는 나치독일의 국회의사당 날조를 통한 좌파탄압등으로 그 댓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절대 다수 일반 국민들이 아는 것은 좌파정당인 SPD가 베르사이유 조약에 서명했다는 것 뿐이다. 히틀러가 진실을 알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의 진실에는 관심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등 뒤의 비수’, 즉, 후방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조약에 서명했다는 부인할 수 없는 공개된 사실이며, 많은 독일인들에게도 그랬다. 알았다고 한들, 히틀러가 그 사실을 공표할 것이라는 환상은 갖지 말자. 히틀러는 현실적인 정치가다.
히틀러가 구술하여 집필한 《나의 투쟁》등을 살펴보면 반유태주의나 러시아 등 동유럽에서 생활권(Lebensraum) 확보에 대한 언급은 끊이지 않고 나온다. 물론 이것말고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맹렬한 공격적 태도 또한 여실히 드러난다(물론 이 책은 NSDAP 정권 장악이전에는 거의 읽혀지지 않았고, 읽은 사람들도 몽상가의 생각이라고 대부분 무시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야기들을 하나 둘씩 실천에 옮겼다).
정권장악을 위해 히틀러는 반유태주의보다 좌파에 대한 공격을 우선시할 것을 선택한다. SPD와 KPD는 전후의 혼란 와중에서도 강력한 정치적 입지를 다지고 국회를 장악한 정당이다. 특히 SPD는 1919년부터 1933년까지 거의 모든 연립정권에 참여했을 정도로 원내 제1당이기도 했다. 1923년 11월에 시도했던 뮌헨쿠테타에서 처참한 좌절을 맛보고 합법적 절차를 통한 정권장악을 모색하기로 한 히틀러에게 급한 문제는 반유태주의가 아니라, 국회를 공고히 장악한 좌파세력과 권력투쟁에서 승리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NSDAP의 모든 노력은 좌파와의 권력투쟁에 몰두한다. 그렇다고 유대인을 잊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숨기지도 않았다.
반공주의로는 정치적 입지 굳히기가 부족한 NSDAP는 좌파세력이 1차 타겟이라면, 2차 타겟을 유대인으로 삼게 된다. 이미 독일의 경제를 유대인 대자본가들이 장악하여 독일인 실업자들이 취직을 못하고 있다는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주장하던 NSDAP이다. 보유자원의 대부분을 좌파와의 권력투쟁에 돌리면서도 반유태주의 선전은 결코 줄어들지는 않았다. 고리대금업자, 자본가, 돈으로 게르만 처녀를 사는 돼지(원조교제의 원조 쯤이 되겠다) 등등으로 악선전은 계속되었다.
빌미는 블라디미르 레닌이 제공했다. 레닌은 유대인이며, 러시아 혁명의 많은 지도자들이 유대인이었다. 이 점에 착안하여 히틀러는 '공산주의 = 유대인'이라는 이상한 공식을 내세운다. 독일 사회주의자들 중에서도 유대인이 있는데, 1919년 스파르타쿠스단의 봉기때 주동자인 로자 룩셈부크르도 그런 경우였다. 유대인은 러시아 사회에서도 엄청난 반유태주의에 시달려,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학살을 겪은 바 있다. 그래서 이들이 러시아 혁명에 적극 가담한 것인데, 히틀러는 이를 '유대인 = 좌파'라는 공식으로 내재화한 것이다(전쟁 중 유대인들을 싫어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유대인 학살에 SS의 보조병으로 가담한 데에는 이런 사정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아주 아이러니하게까지 보이는 공식이 성립된다. '유대인 = 자본가, 유대인 = 좌파, 자본가 = 좌파.'라는 공식이었는데, 지금 우리 눈으로 보기엔 무지하게 이상하지만, 히틀러에게는 별 문제없는 공식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감없이 필요와 장소, 시기에 따라 적절하게 내세운다.
정권 장악 이전에는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세력과의 권력투쟁에 비중을 맞춘 관계로 반유태선전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것으로 보수 우익 집단(융커, 군부), 몰락한 중산층, 자본가(부자, 기업가), 관료, 사법세력 등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고, 실업자들은 SA로 흡수한다. SA는 적당히 폭력을 휘두르면 월급을 주었기에 좋은 직장이었다. 백색 테러집단으로 활동하던 수많은 제대 군인들도 SA와 SS로 합류하고, 전쟁을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희망을 잃은 청년들도 SA나 SS에 합류한다(SS는 본래 SA의 한 부서로서 1934년 룀 숙청이후 SA로부터 조직편제상으로도 완전히 독립하게 됨).
독일 경제가 회복되어가던 중에는 거의 지지를 얻지 못했던 NSDAP는 1929년의 대공황으로 다시금 일어설 수 있었고, 히틀러 자신도 깜짝 놀랄 정도의 지지세력의 급상승을 밑바탕 삼아 1933년 1월 30일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정권을 장악하면서 좌익은 처절하게 분쇄당한다. 너무나 빠른 속도와 행동력으로 그들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절정에 달한 것은 1933년 2월에 있었던 의사당 방화 사건이다. 이 사건은 NSDAP의 자작극이라는 설이 유력한 사건이지만, 이 사건으로 나치는 반대파(주로 공산당과 SPA)를 탄압할 기회를 잡았다. 마지막 마무리는 5월 1일이었다. 좌파계 노동조합을 일제히 해체하면서, 새벽에 그들을 급습하며 노조 지도자들을 모조리 잡아가고 로베르트 라이를 지도자로 하는 새로운 독일노동전선의 설립을 발표한다. 이로써 독일 내부에서 좌파 세력은 정치세력으로서는 씨가 말라버리게 된다(좌파 세력들이 이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속도와 폭력으로 한꺼번에 도려진 것이다).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는 국회에서 의석을 갖고 있는 좌파세력을 탄압해야 했던 NSDAP지만 이제 그 과정이 끝났다. 이로써 완전한 우파독재정권을 수립한다. 수립한 이후에는 새로운 희생거리가 필요했다. SA와 SS로 대표되는 NSDAP의 폭력을 독일 국민들이 언제까지나 용인해줄 것이라는 환상은 아무도 갖고 있지 않았다. 더 새로운 희생양이 필요했다. 1934년, NSDAP의 내부 골치거리를 해결하여 당내에서 권위를 확립한 히틀러는 유대인에게로 독일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게 된다. 뉘른베르크법과 같은 악랄한 인종차별법이 등장한 것이 1935년 이후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물론 괴벨스가 주도한 NSDAP의 선전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다양한 연구와 평가가 엇갈리지만). 좌파와 우파내 히틀러 반대세력을 처리한 후에 본격적으로 유대인에게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다.
인종주의와 민족주의를 내세워 정권을 유지한 히틀러에게 그에 대한 지지를 계속 끌어내기 위해서는 유대인의 "위협"을 강조해야 했다. 약발이 떨어지면 지지가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그 강도를 높여갈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내세운 이론을 믿고 따르는 부하들의 충성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전쟁 발발 이후에 유대인 탄압이 더욱 강화되는 것도, 학살이 전쟁 중에 시작된 것도 점점 강도를 높여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기에 자연스런 귀결이라 생각된다. 자신이 내세운 논리에 대한 지지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 그 논리를 확대해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이고, 끝내 최종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순간에 직면하게 되는 법이다. 게토로 분리, 특정 지역으로 이주, 강제수용소 수감 등의 방법으로는 유대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믿은 그들에게 최종적으로 남은 해결책은 학살밖에 없었던 것이다.
[편집] 반유태주의와 종교적 배경
그럼 반유태주의가 히틀러만 가진 것일까? 히틀러가 처음으로 내세운 것일까? 그런 것은 아니다. 유럽에서 반유태주의의 전통은 유구하다.그 전통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왜 독일 국민들과 히틀러의 부하들이 겉으로 드러난 탄압과 숨겨진 학살에 동조했는지는 설명이 된다. 유럽인들의 뿌리깊은 반유태주의는 윌리엄 세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도 잘 표출된다. 거기서 악덕 고리대금업자로는 나오는 샤일록이 바로 유대인이다.
유럽에서 반유태주의의 전통이 생긴 이유는 크게 2가지이다. 먼저 언급할 것은, 종교상의 문제이다. 이는 크게 2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유대교와 기독교 간의 교리 상의 차이이다. 유태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다(이 점은 이슬람교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화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유태교 신자들은 유대인만이 그 신자가 되며, 구세주는 아직 오지 않았고 자신들이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고, 지금도 그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유태교 입장에서는 극단적으로 말해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을 배신하고 개나 소나 신자로 다 받아들인 배신자이며(인종적 순수성을 따지는 것은 유대인도 히틀러 못지 않다). 유대인은 그리스도를 다만 여러 예언자 중의 하나로 밖에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삼위일체교리를 통해 하느님으로 모신다. 기독교 입장에서는 그들의 하느님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한 유대인을 증오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를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형으로 죽인 것은 그를 위협세력으로 규정한 로마 제국이지만, 예수를 죽이라고 로마 총독을 부추기고 요구한 것은 바로 유대인이었다. 당시 로마 총독 본티오 빌라도는 극우 유대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들의 요구대로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했을 뿐이다. 로마제국 입장에서는 예수와 다른 유대인 및 유태교 보수파 간에 갈등은 이해하기 힘든 그들만의 갈등일 뿐이었다. 다신교를 믿고 있어서 정복지의 신도 종교갈등을 막기 위해 자신들의 신으로 편입시키는 종교정책을 지닌 로마제국으로서는 '예수가 하느님이냐, 예언자냐' 같은 교리 논쟁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 관심도 없었다. 하여간 만일 로마가 예수를 죽였다면, 반유태주의가 아니라 반이탈리아주의가 성행했을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둘러싼 양 종교 간의 교리 차이 및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에 죽게한 원죄에 대한 갈등이 유럽인들의 유대인 박해의 1차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고작 그런 정도로 가지고 그러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476년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유럽은 기독교가 모든 것을 지배해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심지어 19세기 중반까지도 진화론을 놓고 종교계와 과학계가 과학논리로 논쟁을 한 것이 아니라 진화론이 성서말씀에 위배되느냐는 문제로 논쟁을 하던 사회가 유럽사회이다. 다른 어느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이 성행하던 곳이기도 하다(이 종교재판으로 숱한 유대인이 죽기도 했다).
두번째는 생활사 관점에서 보았을때 유대인들의 폐쇄적인 생활 태도에 있다. 그들은 탈무드만을 읽으며 그들의 고유 생활방식을 지독스레 고집한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를 봐도 전쟁의 그 와중에서도 그들은 유대교를 상징하는 촛대를 항상 챙기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의 도시에 살면서 그들만의 공간(게토)에 모여 살고 기독교와 교류보다는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고집하며 어울리지 않았다(유명한 바르샤바 게토는 천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유대인 거주 구역을 뜻하는 말이었다. 지금은 그 의미가 바뀌었고, 의미를 바꾼 사람이 바로 히틀러임). 중세에 흑사병이 유행했을때도 유대인들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한다. 이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주변을 청결하게 하는 유대인들의 생활습관 덕분이라고 하는데, "위생"에 대한 개념이 없던 유럽인들에게는 그런 유대인들이 두려움과 저주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화장과 향수의 유래를 생각해보라).
[편집] 문화적 배경
기독교인들과 어울리지 않는 배타적인 공동생활. 여기에 마지막 원인이 더해진다
샤일록의 이미지에서 연상되듯 유대인들은 지역마다 경제를 장악해왔다. 마치 중국계 화교처럼( 화교가 경제권을 장악하지 못한 극소수 국가 중의 하나가 한국과 일본이다). 이것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일단 나라를 잃고 떠돌이 생활을 하게된 유대인 입장에서는 돈 외에는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없었다. 오로지 돈만 보게 된다. 당시 열악한 경제 활동 여건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는 다른 방도가 없다. 샤일록처럼 악랄하게 되가는 것이다.
게다가 중세 유럽에서는 청빈을 실천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영향으로 돈을 천한 것이라 여겨 직접 손을 대지 않는 전통이 있었다. 토지에 기반한 봉건제 하에서 귀족이나 가톨릭 사제들은 상업을 천한 것으로 생각하여 직접 손을 대지 않았다. 상업 자체가 로마 제국 시대에 비해 낙후되어 있었고, 농민은 무조건 농사를 지어야 했다. 귀족은 전투와 지배, 무력으로 질서 유지를 하는 고귀한 신분이었고, 가톨릭 사제는 하느님에게 봉사하는 성직자였다. 시민계급이 형성되기 전에 돈을 다루는 일을 할 사람이 유대인 말고는 없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경제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사실 이런 문화적 전통은 후대에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귀족계급이 부르죠와에게 밀리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돈을 다루는 일을 하지 않았던 귀족 계급이 돈이 딸리자 부르주아들에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팔게 되거나, 부르죠와들에게 자신들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면서 신분상승을 꾀하던 부르주아 계급과 손을 잡게 되는 것으로, 가장 손쉬운 방법이 결혼이었다).
각설하고, 중세 이후로 유대인들이 지역 상권을 장악한 것은 사실이다(물론 중세 유럽의 사회가 그러한 것을 허용하고 조장한 측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물론 16~18세기에 들어와 소위 말하는 proto-capitalism(원시 자본주의)이 태동하고 자본주의가 확산되면서 비유태계 부르죠와들이 성장하게 되지만, 유대인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모든 유대인들이 그런 생활을 한 것도 아니고 평범한 농부들이나 장인들도 많았지만(홀로코스트에 그려지는 유대인은 모두 이런 순박한 유대인들로만 그려졌다. 학살을 감행하는 독일인과 강렬한 대조를 이루게 하려는 목적도 있을 것이지만, 반드시 그런 목적만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마치 모든 유대인이 샤일록과 같은 자로만 머리 속에 남아있게 된 것이다. 마치 모든 이슬람교도가 과격테러분자인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한 미국의 네오콘처럼 .
이 반유태주의 전통은 독일에서만의 일이 아니다. 이미 앞서 언급했지만 우크라이나나 러시아에서도 독일 못지 않게 학살을 감행한 국가들 중 하나이다. 거의 대부분의 유럽국가에 크고 작은 반유태주의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히틀러는 본래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반유태주의 전통을 국가 권력 차원에서 조직하고 활용한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수많은 피점령민들이 NSDAP에 부역한 것에도 이 반유태주의는 무시못할 비중을 차지한다. 가장 대표적인 국가가 우크라이나같은 경우이며, 프랑스인 수만명이 NSDAP와 운명을 같이한 것도 이 반유태주의가 큰 몫을 차지했다(피점령민들이 NSDAP에 부역한 배경은 사뭇 천차만별이다. 우크라이나나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같은 발트3국은 반러시아감정 때문에, 보스니아 회교도들과 크로아티아 가톨릭교도들은 세르비아 정교회에 대한 반감으로, 아직 볼세비키에 반감을 가진 백계 러시아인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