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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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는 구석기 시대 이후의 주로 한반도와 만주, 넓게는 동아시아 지역을 배경으로 발전되어 온 한국인의 역사이다.
목차 |
[편집] 선사 시대
[편집] 유적에 의한 구분
- 한국의 구석기 시대(20만 년 이전 ~ 약 1만 년 전)
- 한국의 신석기 시대(약 1만 년 전 ~ 약 4천 년 전)
참고>> 웅기 부포리와 평양 만달리 유적, 통영 상노대도의 조개더미 최하층, 거창 임불리, 홍천 화화계리 유적 등을 중석기 유적지로 보는 사학자도 있다.
[편집] 문헌에 의한 구분
[편집] 상고 시대 (B.C. 2333년 ~ A.D. 1세기)
농경의 발달로 잉여 생산물이 생기고 청동기가 사용되면서 사유 재산 제도와 계급이 발생하였고, 그 결과, 부와 권력을 가진 족장(군장)이 출현하였다고 추측된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고인돌이 있다. 부족장은 세력을 키워 주변 지역을 아우르고, 마침내 국가를 이룩하였다. 이 시기에 성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가 고조선이다. 기원전 4C경 철기가 보급되었고, 이후, 고조선은 철기 문화를 수용하면서 중국과 대립할 정도로 크게 발전하였으며, 만주와 한반도 각지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등 여러 나라가 성립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다.
[편집] 고조선 시대
조선 시대에는 은나라에서 건너온 기자가 세운 기자조선이 정식 역사로서 인정되었으나, 일제강점기를 전후로 점차 부인되어 현재에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학계 모두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사학자들도 대체적으로 이 설을 부정한다.
[편집] 고조선 멸망 이후 여러나라의 성장
철기문명을 받아들인 각 나라들은 철기를 이용하여 농업을 발전시키면서도 독특한 사회 풍습을 유지하였다. 많은 소국들이 경쟁하는 가운데 일부는 다른 나라를 병합되었고, 다시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여 중앙 집권 국가를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편집] 고대 시대 (A.D. 1세기~A.D. 917)
[편집] 삼국시대
[편집] 남북국시대
[편집] 중세시대 (A.D. 918년 ~ A.D. 1392년)
- 한국사에서는 고려시대를 중세시대로 보고 있다.
[편집] 고려의 정치
고려는 새로운 통일 왕조로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고려의 성립은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 이행하는 우리 역사의 내재적 발전을 의미한다. 신라말의 득난(6두품 세력) 출신 지식인과 호족 출신을 중심으로 성립한 고려는 골품 위주의 신라 사회보다 개방적이었고, 통치 체제도 과거제를 실시하는 등 효율성과 합리성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다. 특히, 사상적으로 유교 정치 이념을 수용하여 고대적 성격을 벗어날 수 있었다.
고려 시대는 외적의 침입이 유달리 많았던 시기였다. 그러나 고려는 줄기찬 항쟁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12세기 후반에 무신들이 일으킨 무신정변은 종전의 문신 귀족 중심의 사회를 변화 시키는 계기가 되어 신분이 낮은 사람도 정치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후, 무신 집권기와 원나라 간섭기를 지나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새롭게 성장한 신진 사대부를 중심으로 성리학이 수용되어 합리적이고 민본적인 정치 이념이 성립되었고, 이에 따른 사회 개혁이 진전되었다.
[편집] 고려의 경제
고려는 후삼국 시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전시과 제도를 만드는 등 토지 제도를 정비하여 통치 체제의 토대를 확립하였다. 또, 수취 체제를 정비하면서 토지와 인구를 파악하기 위하여 양전 사업을 실시하고 호적을 작성하였다. 아울러 국가가 주도하여 산업을 재편하면서 경작지를 확대시키고, 상업과 수공업의 체제를 확립하여 안정된 경제 기반을 확보하였다.
농업에서는 기술의 발달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었고, 상업은 시전을 중심으로 도시 상업이 발달하면서 점차 지방에서도 상업 활동이 증가하였다. 수공업도 관청 수공업 중심에서 점차 사원이나 농민을 중심으로한 민간 수공업을 중심으로 발전해 갔다.
[편집] 고려의 사회
고려의 사회 신분은 귀족, 중류층, 양민, 천민으로 구성되었다. 고려 지배층의 핵심은 귀족이었다. 신분은 세습되는 것이 원칙이었고, 각 신분에는 그에 따른 역이 부과되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는데, 향리로부터 문반직에 오르는 경우와 군인이 군공을 쌓아 무반으로 출세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백성의 대부분을 이루는 양민은 군현에 거주하는 농민으로, 조세, 공납, 역을 부담하였다. 향, 부곡, 소 같은 특수 행정 구역에 거주하는 백성은 조세 부담에 있어서 군현민보다 차별받았으나, 고려 후기 이후 특수 행정 구역은 일반 군현으로 바뀌어 갔다. 흉년이나 재해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국가는 의창과 상평창을 설치하고, 여러 가지 사회 복지 시책을 실시 하였다.
[편집] 고려의 문화
고려 시대에 해당하는 중세 문화는 고대 문화의 기반 위에서 조상들의 노력과 슬기가 보태져 새로운 양상을 보였다.
유교가 정치 이념으로 채택, 적용됨으로써 유교에 대한 인식이 확대 되었으며, 후기에는 성리학도 전래 되었다. 불교는 그 저변이 확대되어 생활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 이런 가운데 불교 사상이 심화되고, 교종과 선종의 통합운동이 꾸준히 추진되었다.
중세의 예술은 귀족 중심의 우아하고 세련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건축과 조각에서는 고대의 성격을 벗어나 중세적 양식을 창출하였으며, 청자와 인쇄술은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그림과 문학에서도 중세의 품격 높은 멋을 찾아 볼 수 있다.
[편집] 근세시대 (A.D. 1392년 ~ A.D. 1506년)
- 한국사에서는 초기 조선 시대를 근세시대로 보고 있다.
[편집] 초기 조선의 정치
조선은 왕과 양반 관료들에 의하여 통치되었다. 왕은 최고 명령권자로서 통치 체제의 중심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 말에 성리학을 정치 이념으로 하면서 지방에서 성장한 신진 사대부들이 지배층이 되어 정국을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15세기 말부터 새롭게 성장한 사림이 16세기 후반 이후 정국을 주도해 나가면서 학파를 중심으로 사림이 분열하여 붕당을 이루었다. 이후 여러 붕당 사이에 서로 비판하며 견제하는 붕당 정치를 전개하였다.
정치 구조는 권력의 집중을 방지하면서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다. 관리 등용에 혈연이나 지연보다 능력을 중시하였고, 언로를 개방하여 독점적인 권력 행사를 견제하였다. 아울러 육조를 중심으로 행정을 분담하여 효율성을 높이면서 정책의 협의나 집행 과정에서 유기적인 연결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조선은 고려에 비하여 한 단계 발전된 모습을 보여 주면서 중세 사회에서 벗어나 근세 사회로 나아갔다.
[편집] 초기 조선의 경제
조선은 고려 말기의 파탄된 국가 재정과 민생 문제를 해결하고 재정 확충과 민생 안정을 위한 방안으로 농본주의 경제 정책을 내세웠다. 특히 애민사상을 주장하는 왕도 정치 사상에서 민생 안정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조선 건국을 주도하였던 신진 사대부들은 중농 정책을 표방하면서 농경지를 확대하고 농업 생산력을 증가시키며, 농민의 조세 부담을 줄여 농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건국 초부터 토지 개간을 장려하고 양전 사업을 실시한 결과 고려 말 50여만 결이었던 경지 면적이 15세기 중엽에는 160여만 결로 증가하였다. 또한 농업 생산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새로운 농업 기술과 농기구를 개발하여 민간에 널리 보급하였다.
반면 상공업자가 허가 없이 마음대로 영업 활동을 벌이는 것을 규제하였는데, 이는 당시 검약한 생활을 강조하는 유교적인 경제관을 가진 사대부들이 물화의 수량과 종류를 정부가 통제하지 않고 자유 활동에 맡겨 두면 사치와 낭비가 조장되며 농업이 피폐하여 빈부의 격차가 커지게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당시 사회에서는 직업적인 차별이 있어 상공업자들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였다.
[편집] 초기 조선의 사회
조선은 사회 신분을 양인과 천민으로 구분하는 양천 제도를 법제화하였다. 양인은 과거에 응시하고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자유민으로서 조세, 국역 등의 의무를 지녔다. 천민은 비(非)자유민으로서 개인이나 국가에 소속되어 천역을 담당하였다.
양천 제도는 갑오개혁 이전까지 조선 사회를 지탱해 온 기본적인 신분 제도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양천 제도의 원칙에만 입각하여 운영되지는 않았다. 세월이 흐를수록 관직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던 양반은 하나의 신분으로 굳어져 갔고, 양반 관료들을 보좌하던 중인도 신분층으로 정착되어 갔다. 그리하여 지배층인 양반과 피지배층인 상민 간의 차별을 두는 반상 제도가 일반화되고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신분 제도가 점차 정착되었다.
조선 시대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으나 신분 이동이 가능하였다. 법적으로 양인 이상이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하여 관직에 오를 수 있었고, 양반도 죄를 지으면 노비가 되거나 경제적으로 몰락하여 중인이나 상민이 되기도 하였다.
[편집] 초기 조선의 문화
조선 초기에는 괄목할 만한 민족적이면서 실용적인 성격의 학문이 발달하여 다른 시기보다 민족 문화의 발전이 크게 이루어졌다. 당시의 집권층은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을 위하여 과학 기술과 실용적 학문을 중시하여, 한글이 창제되고 역사책을 비롯한 각 분야의 서적들이 출반되는 등 민족 문화 발전의 기반이 형성되었다.
성리학이 정착, 발달하여 전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고, 여러 갈래의 학파가 나타났다. 15세기 문화를 주도한 관학파 계열의 관료들과 학자들은 성리학을 지도 이념으로 내세웠으나 성리학 이외의 학문과 사상이라도 좋은 점이 있으면 받아들이는 융통성을 보였다. 불교는 정부에 의하여 정비되면서 위축되었으나 민간에서는 여전히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천문학, 의학 등 과학 기술에 있어서도 큰 발전을 이룩하여 생활에 응용되었고, 농업 기술은 크게 향상되어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켰다.
예술 분야에서도 민족적 특색이 돋보이는 발전을 나타내었고, 사대부들의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이 반영된 그림과 필체 및 자기 공예가 두드러졌다.
[편집] 근대 태동기 (A.D. 1506년 ~ A.D. 1907년)
- 한국사에서는 후기 조선 시대를 근대 태동기로 보고 있다.
[편집] 후기 조선의 정치
숙종 때에 이르러 붕당 정치가 변질되고 그 폐단이 심화되면서 특정 붕당이 정권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의 추세가 대두되었다. 붕당 정치가 변질되자 정치 집단 간의 세력 균형이 무너지고 왕권 자체도 불안하게 되었다. 이에 영조와 정조는 특정 붕당의 권력 장악을 견제하기 위하여 탕평 정치를 추진하였다. 탕평 정치는 특정 권력 집단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지만, 붕당 정치의 폐단을 일소하지는 못하였다.
탕평 정치로 강화된 왕권을 순조 이후의 왕들이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면서 왕실의 외척을 중심으로 한 소수 가문에 권력이 집중되고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는 세도 정치가 전개되었다. 이로써 부정부패가 만연해지고 정부의 백성들에 대한 수탈이 심해졌다.
[편집] 후기 조선의 경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농촌 사회는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수많은 농민들이 전란 중에 죽거나 피난을 가고 경작지는 황폐화되었다. 이에 정부는 수취 체제를 개편하여 농촌 사회를 안정시키고 재정 기반을 확대하려 하였다. 그것은 전세 제도, 공납 제도, 군역 제도의 개편으로 나타났다.
서민들은 생산력을 높이기 위하여 농기구와 시비법을 개량하는 등 새로운 영농 방법을 추구하였고, 상품 작물을 재배하여 소득을 늘리려 하였다. 상인들도 상업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자본을 가진 상인들도 출현하였다. 수공업 생산도 활발해져 민간에서 생산 활동을 주도하여 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본 축적이 이루어지고, 지방의 상공업 활동이 활기를 띠었으며, 상업 도시가 출현하기에 이르렀다.
[편집] 후기 조선의 사회
조선 후기 사회는 사회 경제적 변화로 인하여 신분 변동이 활발해져 양반 중심의 신분 체제가 크게 흔들렸다. 붕당 정치가 날이 갈수록 변질되어 가면서 양반 상호 간에 일어난 정치적 갈등은 양반층의 분화을 불러왔다. 이러한 현상은 일당 전제화가 전개되면서 더욱 두드러지고 권력을 장악한 소수의 양반을 제외한 다수의 양반들이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양반 계층의 도태 현상이 날로 심화되어 가면서도 양반의 수는 늘어나고 상민과 노비의 숫자는 줄어드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부를 축적한 농민들이나 해방된 노비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높이기 위하여 또는 역의 부담을 모면하기 위하여 양반 신분을 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급격한 사회 변화에 대한 집권층의 자세는 극히 보수적이고 임기응변적이었다. 이에 계층 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어 갔으며, 19세기에 들어와 평등 사상과 내세 신앙을 주장한 로마 가톨릭이 유포되면서 백성들의 의식이 점차 높아져서[출처 필요] 크고 작은 봉기가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정부는 로마 가톨릭이 점차 교세가 확장되자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 부정과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출처 필요] 사교로 규정하고 탄압을 가하기에 이르렀다.
[편집] 후기 조선의 문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사회 각 분야의 변화와 함께 문화에서는 새로운 기운이 나타났다. 양반층 뿐만 아니라 중인층과 서민층도 문화의 한 주역으로 등장하면서 문화의 질적 변화와 함께 문화의 폭이 확대되었다.
학문에서는 성리학의 교조화와 형식화를 비판하며 실천성을 강조한 양명학을 받아들였으며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여 비판적이면서 실증적인 논리로 사회 개혁론을 제시한 실학이 대두되어 개혁 추진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천문학의 의학 등 각 분야의 기술적 성과들이 농업과 상업 등 산업 발전을 촉진하였다. 서양 문물의 유입도 이러한 발전을 가속화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예술 분야에서는 판소리, 탈품, 서민 음악 등 서민 문화가 크게 유행하였고, 백자 등 공예도 생활 공예가 중심이 되었다. 자연 경치와 삶을 소재로 하는 문예 풍토가 진작되어 문학과 서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편집] 근현대시대 (A.D. 1907년 ~ )
[편집] 개괄
조선 사회는 안에서 성장하고 있던 근대적인 요소를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한 채 19C 후반 제국주의 열강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후 정부와 각계(各界), 각당(各堂), 각단체(各單體), 각층(各層), 각파(各派)에서는 근대화하려는 노력을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개항 이후 우리나라는 서구 문물을 수용하고 새로운 경제 정책을 펼치면서 자주적인 근대화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일본과 청을 비롯한 외세의 경제 침략이 본격화 되면서, 이러한 노력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개항 이후, 사회 개혁이 진행되면서 신분 제도가 폐지되고 평등 의식도 점차 성장하였다. 또, 외국과의 교류를 통해 외래 문물과 제도 등이 수용됨에 따라 전통적인 생활 모습에도 많은 변화가 생겨났다.
개항 이후 서양 과학 기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전기, 철도, 같은 근대 기술과 서양 의술 등 각종 근대 문물이 들어왔다. 근대 시설은 일상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었으나, 열강의 침략 목적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일제는 강압적인 식민 통치를 통하여 우리 민족을 지배하였다. 이에 맞서 우리 민족은 국내외에서 무장 독립 투쟁, 민족 실력 양성 운동, 독립 외교 활동 등을 벌여 일제에 줄기차게 저항하였다. 이러한 우리 민족의 투쟁과 연합군의 승리로 1945년 8월에 광복을 맞이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의 경제적 침략으로 경제 발전이 왜곡되어, 우리 민족은 고통을 겪게 되었다. 광복 이후 일제의 식민 지배를 벗어나면서부터는 새로운 경제 발전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분단과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도 대단히 컸다.
일제 강점기에는 국권을 되찾으려는 독립 운동이 줄기차게 일어났고, 다른 한편에서는 근대화를 위한 각계(各界), 각당(各堂), 각단체(各單體), 각층(各層), 각파(各派)에서는 근대화하려는 노력이 펼쳐졌다. 이러한 가운데 근대 자본주의 문명이 본격적으로 유입되어 전통 사회는 점차 근대 사회로 변모해 갔는데, 식민지 현실 아래에서 근대화는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국권을 탈취한 후에 동화와 차별의 이중 정책을 바탕으로 황국 신민화를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특히,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꺾으려고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왜곡하였다. 이에 맞서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지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런데, 미∙소의 한반도 분할 정책과 좌∙우익 세력의 갈등으로 남북이 분단되어 통일 국가를 세우지 못하였다. 특히, 6∙25 전쟁을 겪으면서 분단은 더욱 고착화되고 남북 사이의 상호 불신이 깊어 갔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많은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4∙19혁명과 5∙18민주화 운동, 6월 민주 항쟁 등으로 민주주의가 점차 발전하였다. 이와 함께, 냉전 체제가 해체되면서 민족 통일을 위한 노력도 계속 되고 있다.
1960년대 이후 한국 경제는 비약적인 성장을 일구어 냈다. 한국은 이제 가난한 농업 국가가 아닌, 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 변모하고 있다.
광복 후에 우리나라는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경제 발전을 이룩하였는데, 이는 커다란 사회 변화를 가져왔다. 농업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다시 정보화 사회로 발전하면서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가치관도 많이 변하였다.1980년대에 진행된 민주화 운동으로 권위주의적 정치 문화가 점차 극복되고, 사회의 민주화도 꾸준히 이루어 졌다.
광복이후에는 학문 활동이 활발해지고 교육의 기회가 크게 확대되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서구 문화가 급속하게 유입되면서 가치관의 혼란과 전통문화의 위축 현상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민주화와 더불어 문화의 다양화가 촉진되고, 반도체 등 몇몇 과학 기술 분야는 세계적인 수준까지 도달하였다. 한편, 현대 사회의 윤리와 생명 과학 기술의 발달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을 해소하려는 노력도 펼쳐지고 있다.
[편집] 근대시대
- 대한 제국
- 일제강점기 : 일본의 제국주의 세력이 한반도를 강제적으로 식민지로 삼은 시기
- 무단 통치 시기 : 조선을 영구히 통치하기 위해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의병 활동을 억누르고 국내의 저항 세력을 무단으로 통치한 시기이다. 토지조사령을 공포하여 식민지 수탈을 시작하였고, 회사령을 공포하여 국내의 자본 세력을 억압하고 일본 자본 세력의 편의를 봐주었다. 이 시기의 한국인 노동자는 극악한 환경과 저임금, 민족적 차별까지 받으며 혹사 하였다.
- 문화 통치 시기 : 3·1 운동이 발발하자 일제는 무단통치로는 조선을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친일파를 육성하는 문화정책을 펼친다. 이는 한민족을 기만하는 정책이었다. 이 들은 교육의 기회를 늘리고 자본 운용의 기회, 참정권의 기회등을 제공하였으나, 결국은 조선을 선동 정치 하기위한 친일파 육성에 주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 전시 체계 시기 : 1941년 일제가 미국의 진주만을 불법적으로 기습하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였다. 조선에서는 일제의 강제 징용으로 한국인 노동력이 착취 되었고, 학도 지원병 제도, 징병 제도 등을 실시하여 수많은 젊은이를 전쟁에 동원하였다. 또, 젊은 여성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여 군수 공장 등에서 혹사시켰으며, 그 중 일부는 전선으로 끌고 가 일본군 위안부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다.
[편집] 현대시대
- 군정기 : 미국과 소련의 군대가 진주하여 한반도에 정부가 세워지기 이전까지의 시기
- 대한민국
- 제1공화국
- 제2공화국
- 제3공화국
- 제4공화국 - 유신헌법시기. 종신 대통령제 채택
- 제5공화국
- 1. 정치 : 전두환 정부(군사 쿠데타에 의한 정부 - 12.12 사태) 시기. 대통령 간접선거제도 채택. 이 시기에는 민주화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이 자행되었으나, 광범위한 대중들의 1987년 6월 혁명으로 6월29선언(대통령 직접선거제도 공약)을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
- 2. 경제 : 1960~70년대에 닦아온 중공업, 경공업 기반을 첨단공업 수준으로 이끌어 올린 시기이다. 이 시기의 한국 경제는 세계에서 유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으며, 국내 물가가 가장 안정된 시기였다.
- 3. 문화 :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을 개최하였고, 1988년 서울 올림픽 게임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 제6공화국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편집] 각주
[편집] 인터넷 정보
[편집] 역사 일반
- 국사 편찬 위원회 : 한국사에 관한 정보를 수집, 정리, 편찬하는 국가 연구 기관, 소장 자료, 논문, 저서 검색, 한국사 관련 연구 기관. 소장 자료, 논문, 저서 검색, 한국사 관련 안내
- 국사 전자 교과서 : 현직 교사들이 연구.감수하고, 국사편찬위원회가 지원하였다. 2007년 개정된 국사교과서의 내용이 아직 반영되지 않았다.
- 한국 역사 정보 시스템 : 한국사 연표, 한국사 기초 사전 및 신문 자료, 문헌 자료, 문집 등을 제공
- 한국학 중앙 연구원 : 한국 문화 및 한국학 여러 분햐에 관한 연구와 교육을 수행하는 연구 기관. 디지털 한국학 개발, 정보 광장, 전자 도서관, 전통 문화 등 수록
- 역사 문제 연구소 : 순수 민간 연구 단체(역사적 중립성이 의심됨), 근현대사 자료실, 간행물 자료, 한국사 학습 자료 등 수록
[편집] 재단, 기타, 정부 기관
- 고구려 연구재단 : 고구려사를 비롯한 중국의 역사 왜곡에 학술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2004年 설립된 법인. 고구려, 발해를 비롯한 동아시아 역사 관련 자료의 조사, 수집, 정리, 정보화 자료 제공. 동북아역사재단으로 편입되어 더이상 유용하지 않다.
- 국가 기록 영상관 : 대한 뉴스, 문화 기록 영화, 대통령 기록 영상 등 멀티미디어 역사 자료 제공
- 국가 문화 유산 종합 정보 서비스 : 국보, 보물, 사적, 명승, 천연 기념물 지정 종목별, 시대별, 지역별, 유형별, 유물 정보, 검색 서비스 제공
- 국가 지식 정보 통합 검색 시스템 : 정보 통신부 제공, 과학 기술, 정보 통신, 교육, 학술, 문화, 역사 등의 포괄적이고 연동적인 학술 데이터 검색
- 국가기록유산 : 국가적 기록유산의 원본과 원문 열람 서비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