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그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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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그람시(이탈리아어: Antonio Gramsci, 1891년 1월 22일-1937년 4월 27일)는 이탈리아 공산당 창시자이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반 파시즘을 주장한 이탈리아 지식인, 정치인 그리고 지도자와 사상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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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그람시는 1891년 빈곤하고 병약한 채로 태어났다. 부친은 하급정부관리였으나 뇌물수수 사건으로 투옥되어 어머니의 삯바느질로 생계유지를 해나갔다고 한다. 4살때 척추를 크게 다쳐 평생 불구로 살게 되었다. 1911년까지 사르디냐 지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녔다. 대학시절 사회주의 운동에 접하게 되어 그에 종사하게 되었다. 1913년 이탈리아 사회당(PSI)에 가입했으며, 1917년을 전후로 이탈리아 노동운동이 대단히 전투적으로 전환되어가는데 서구사회에서 전개된 노동당 평의회 운동에 몰두하기도 했다. 그람시는 이 무렵 PSI의 보수화에 불만을 품고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하여 전투적 레닌주의의 면모를 갖추기도 하는데, 그것은 1920년대의 일이었다.
1920년대의 중요성은 두 가지 상극적 현상이 이태리에서 나타났다는 점이다. 노동운동이 대단한 호전성을 띠고 전개되는 한편, 이탈리아, 독일에서 파시즘과 나치즘이 확산되어가고 있었다. 특히 이탈리아 파시즘은 사회주의 운동에 공포심을 갖고 있던 제대군인들과 자본가들로부터 이미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PSI는 우유부단하고도 개량주의적 모습을 보였다. 정부와 타협하며 노동운동의 급진화에 제동을 거는 한편, 파시즘의 확산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그람시는 이탈리아공산당(PCI)를 창당한다. 이 당시 당서기는 코민테른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당시 그람시의 정치적 입지가 어떠했는지는 불분명하나, 코민테른과 의견을 같이하고 활동했다. 그람시가 당지도부를 장악한 것은 1924년과 1926년 사이이다. 당시 이태리에서는 공산주의와 파시즘이라는 상반된 흐름이 존재했다.
1922년 10월 무솔리니와 파시스트의 로마 진군 이후, 1922년과 26년 사이 파시스트는 노동운동에 대해 강온정책을 함께 사용했다. 이탈리아 사회당을 비롯한 공산당의 의회진출을 허용하면서 공장파업과 같은 사태에는 단호히 대처하는 것이었다. 이태리 공산당 지도부가 의회에 참여하는데, 그람시는 1924년에 의원으로 참여했다. 1926년 그람시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지도권을 장악했다. 1926년 11월 체포되어 옥중시절이 시작되었다. 20년 4개월 5일의 형을 언도받았으나 옥중에서 사망했다.
[편집] 사상
그람치는 수감 기간 중 역사와 정치 분석을 기록한 공책을 30개 이상 남겼다. 이 글은 《옥중수고》(Prison Notebook)라고 알려졌으며 그람치의 이탈리아의 역사와 국민주의 그리고 그람시의 것으로 인식되는 마르크스주의 이론, 비판적 이론과 교육 이론등이 담겨져 있다.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사회주의자들, 마르크시스트들에게 당면 과제는 파시즘을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 라는 것이었다. 파시즘에 대한 그들의 대체적인 태도는 반동적 부르죠와 운동의 또 다른 운동에 불과하다고 보며 파시즘 운동의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라는 면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람시는 파시즘을 자유주의적 학자들처럼 단순히 서구문명의 일탈로 보는 것도 아니고 독점 자본주의의 극단적 지배 형태로 보는 것도 아니다. 사회주의 운동을 지지해야할 쁘띠 부르주아와 노동자 계급조차도 파시즘을 지지했다는 점은 정통적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설명하기 곤란한 문제였다.
[편집] 자본주의 국가의 내구성과 안정성의 원인
《옥중수고》는 그람시가 옥중에서 쓴 책이다. 그람시의 중요한 이론적 관심사는 자본주의 국가의 내구성과 안정성의 원인과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당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과 마찬가지로 혁명의 전망이 불투명해지면서 자본주의 사회가 안정화되어지는 것에 대해 탐구했다는 점에서 고전적 마르스크주의와 차이를 보인다. 그람시나 루카치에게는 물적 토대에 대한 분석보다는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 의식, 국가와 같은 상부구조가 더 관심사였다. 그래서 그들을 "상부구조의 이론가"라고 부른다. 더욱 중요한 차별성의 하나는, 고전적 정치경제학자가 빠지기 쉬운 경제적/기계주의적 위험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다는 점이다.
그람시는 비결정주의적 역사관을 지향했다. 역사와 사회의 변화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법칙성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로서 참가하는 인간의 투쟁, 의지, 참여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것. 그렇다고 해서 인류의 미래가 그때 그때 인간자의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우연의 연속이다라고 본것은 아니다. 기본적 지향은 사회주의이나 그것의 필연적 승리가 보장되어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낙관주의와 비관주의에대해 양쪽 모두를 비판한다.
자본주의의 붕괴가 임박했음을 믿어 의심치 않은 고전적 마르스크주의학자들은 자본주의가 여러 형태로 변화되어지긴 하나 필연적으로는 붕괴할것이라고 여긴다. 이에 비해 루카치, 그람시, 프랑크푸르트 학파들은 고전적 마르스크주의 학자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장기간 자본주의는 안정화되고 내구성을 지니게 될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그러한 맥락에서 왜 자본주의는 안정화되고 내구성을 지니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설명하려한 것이다. 루카치의 물화이론도 이런 맥락이며, 그람시는 정치학적 견지에서 자본주의의 지속성을 규명하고자했다.
고전적 마르스크주의학자는 1871년 파리 꼼뮨을 전후한 혁명적 노동운동을 보면서 그러한 것을 자본주의의 몰락의 징조로 보았으며, 레닌은 제1차 세계 대전을 보면서 자본주의 몰락의 징조를 발견하였음에 반해 그람시는 1871년 이후 혼란 속에서 자본주의가 벗어나 안정화되어지고 확산되어가는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보았다. 그람시는 상부구조의 중요성, 특히나 이데올로기와 국가의 중요성에 주목하였다.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대중적 지지를 얻으며 안정화되어가는가에 관심을 가졌다. 그림시의 이론은 마르크스의 이론을 또 한 번 전도시켰다고까지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마르크스가 관념보다는 물질, 상부구조보다는 하부구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헤겔을 전도시켰다면, 그람시는 상부구조를 강조하고 그 자율성을 인정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물적 토대의 기초를 떠나서는 그러한 것이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즉 절대적 자율성이 아니라 상대적 자율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통적 마르스크주의의 틀을 벗어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전통적 마르스크주의을 보완, 확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람시의 주요개념은, ⓐ정치와 헤게모니, ⓑ역사적 지배블럭, ⓒ시민사회와 통합국가(Integral State), ⓓ유기적 지식인의 역할 , ⓔ진지전과 기동전 등으로 정리할수 있다.
정치 또는 지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보았다. 강제의 측면과 동의의 측면으로 어떤 사실, 어떤 지배도 100% 강제와 100% 동의로만 형성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그 두개가 결합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그 유형이 달라지는 것이다. 국가라고 하는 것은 이 두 가지 측면을 다 포괄하고 있다. 이것은 전통적 마르스크주의과 다른, 진보된 국가론이다. 전통적 마르스크주의에서는 국가는 강제기구라는 점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국가는 자본가계급의 지배와 착취를 위한 수단, 도구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이에 비해 그람시는 국가가 강제와 동의라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가진다고 간파했다. 국가가 지닌 기능의 복합성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그람시는 현실주의적 정치이론을 최초로 정리한 마키아벨리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국가의 기능은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훨씬 더 확장, 발전, 성숙되어 가고 있다고 보았다. 자본주의가 경쟁적 자본주의에서 독점적 자본주의로 발전해가면서 국가의 역할과 기능이 확대되어 갔다고 보았다. 경찰국가가 아니라 경제에 적극 개입하여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보호하는역할을 하였다. 이것이 "국가독점자본주의"이다. 마르크스 시대의 국가는 경쟁적 자본주의 시대의 국가로 시장질서에 가급적 개입하지않으면서 기본적 질서만 바로잡아주는 역할을 할 뿐이었음.
국가는 경제사회영역에서 사회적 재생산을 주도하며 더 나아가 복지 국가로까지 되면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장해주는 기능과 역할에게로까지 확대되었다. 국가는 시민사회의 모든 영역에 침투하여 시민사회를 통해 모든 영역의 활동과 의식을 지배하면서 모든 부분에서 헤게모니적 지배를 확장시키려고 확립하였다.
국가라는 것은 공적 영역의 대표이며 시민사회는 사적인 영역의 대표이다. 마르크스는 시민사회에서 형성된 질서가 국가를 매개로 공식화된다고 보았다. 즉 시민사회가 국가영역을 지배한다고 본 것이다. 국가기능이 점차 확대되어지면서 시민사회는 국가의 사적 네트워크가 되어지게 됨.그 시민사회를 통해 국가는 모든 의식과 조직에 침투할 통로를 확보하는 것이며, 그런 속에서 국가는 통합국가일 수 밖에 없다.강제측면을 담당하는 부분은 정치사회이고, 동의를 창출하는 부분은 시민사회이다. 그람시의 국가는 "정치사회(강제)+시민사회(동의)"이다.
시민사회란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서구의 사회과학속에는 국가(공적 영역)와 사회(사적 영역)라는 이분법적 개념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다.시민사회는 다양한 사회집단, 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표출하고 조직화하는 영역이다. 따라서 이런 시민사회는 다양한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의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다 . 국가는 바로 이런 시민사회 영역에까지 침투, 사회 각계 각층의 동의를 창출하면서 헤게모니적 지배를 구축한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는 통합국가이다. 통합국가는 시민사회까지 포괄하면서 독재(강제)와 헤게모니(동의)를 구축해나가는 것이다.
[편집] 헤게모니 이론
헤게모니라는 개념은 러시아 마르스크주의에 의해 계급동맹과 관련해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 따라서 마르스크주의 이론가들에게 헤게모니는 낯선 개념이 아니다. 그런 헤게모니를 그람시는 새롭게 해석했다. 계급적 동맹의 원칙의 차원을 넘어선 새로운 유형의 지배질서를 설명하는것으로 그 의미를 확장시킨 것이다. 이데올로기 매개로 기본적 집단과 추종집단이 융합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 수준에서 뿐만아니라 지적 도덕적 수준에서까지 통합을 이루너내고 추종집단의 자발적 동의와 지지까지 창출해내는 것이 헤게모니이다.
러시아 마르스크주의의 헤게모니는 계급동맹시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농민계급간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융합이라는 완전 통일, 통합된 형태이다. 헤게모니 구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단순히 기본계급의 이익을 추종세력이나 동맹세력이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기본집단의 근본적 이익이 훼손되지 않는범위내에서 추종/동맹세력의 이익을 수용, 융합해나갈 수 있어야 진정한 헤게모니지배가 구축되어질 수 있다. 따라서 헤게모니 집단이 되려면 자신의 조합주의적 이익(좁은 의미의 계급적 이익)을 포기하고 다른 집단의 이익을 포괄, 융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헤게모니적 지배를 성립할 수 있다. 그런 능력이 있어야 헤게모니계급(집단)이 될 수 있다.
정치적 수준에서 출발, 도덕적, 지적 수준에까지 통합, 공통의 집단의지를 창출할 수 있을때, 이럴 경우에 역사적 지배블럭이 형성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변형주의(Transformism) : 수동적 동의이며 수동혁명이라는 개념으로 파악. 기본집단들이 동맹집단에 의해 산출되는 능동적요소, 심지어는 적대적 집단으로부터 나오는 요소까지를 점진적으로 흡수, 그들의 반대를 무력화시키는 과정이다. 궁극적으로는 기존의지배질서를 유지시키는 것으로서 추구.
ⓑ 확장적 헤게모니 : 진정으로 다양한 계급의 융합의 폭을 넓혀 감으로써 마침내 で민족적, 민중적と의지로 까지 확장되어가는 헤게모니이다.
기본집단(기본계급)에 대해선 그람시가 분명하게 규명하지 않았다. 계급이란 개념은 경제적 개념이고, 집단이란 개념은 반드시 경제적 개념은 아니다. 기본계급이라고 할때, 경제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계급을 들 수 있다. 부르죠와와 프롤레타리아이다. 기본집단이라고할때, 사회/정치/문화/이데올로기영역에서 공통의 이익을 같은 것을 집단이라고 하기에 이것은 상부구조의 표현이다.
기본집단을 통해 나타나는 헤게모니는 그러므로 상부구조에 해당하는 것이다. 토대에서 형성되는 질서와 상부구조에서 형성되는 질서를 어떻게 집중시키느냐의 문제를 그람시는 애매하게 남겨두었다. 기본계급만이 기본집단으로서 헤게모니를 창출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람시를 마르스크주의라고 취급하는 것이다.
기본계급이 헤게모니계급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추종계급에 대한 확실한 리더쉽을 확립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지도적 집단(공통이익, 세계관같은 이들의 집단)이 역할을 수행하며 지도적 집단을 매개로 헤게모니질서가 확립된다. 시민사회에서 기본계급의 이익을 보장하면서도 다른 세력의 이익을 이용/접합함으로써 헤게모니질서를 확립한다. 이때 나타난 국가는 통합국가이다. 통합국가는 정치사회(강제)+시민사회(동의)의 국가이다.
부르죠와 지배 질서는 강제기구로서 국가기구를 붕괴시킨다고 해도 강고한 시민사회를 바탕으로 한 부분이 남아 있는 한 부르죠와 지배 질서는 무너지지 않는다. 러시아의 경우 혁명적 세력이 강제기구인 국가를 파괴/점령한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기동전이 가능하다. 그러나 서구사회의 경우, 핵심에는 국가기구로서 국가가 잇지만 그 주변에서는 시민사회로서 참호가 둘러싸고 있다. 그러므로 기동전으로 당당하게 뚫고 들어갈 수 없기에 하나하나 참호를 점령해나가야 한다. 이것은 기동전이 아닌 진지전으로서 장구한 시간이 필요하다. 러시아 볼세비키의 혁명전략이 왜 서구사회에 적합하지 않은 지를 설명한 것이다.
그람시는 서구 부르죠와 지배 질서가 얼마나 강고하며 그것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장고한 기간과 인내가 필요한가에 대한 것을 생각했다. 서구의 진지전에서 주동적 역할을 하는 이들은 유기적 지식인이라고 보았다. 대중운동으로서 노동계급보다는 혁명적 지식인의 역할을 상당히강조했다. 레닌이나 루카치에게 있어서는 고전적 마르스크주의에게서보다 혁명적 지식인의 역할이 강조된다. 그람시에 와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람시는 지식인을 크게 두가지로 구분했다. 전통적 지식인과 유기적 지식인이다. 지식인이란, 인간의식, 관념, 사상 등의 상부구조 영역을 담당하는 집단이다. 따라서 모든 지식인은 어떤 형태로든지 "계급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새로운 하부구조가 형성될때에는그것을 옹호하고 전파시키는 그들 나름의 지식인 계급을 배출시키고 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보면 모든 지식인들은 자신들 계급이 가진 집단의지를 결집/확산시키는 특수한 성격의 집단이고 이것이 바로 유기적 지식인이다.
전통적 지식인은 유기적 지식인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자신들을 창출한 생산양식이 붕괴되었음에도 살아남아 현존하는 사회계급과 상관없이 존재한다. 예술가, 작가, 철학자, 성직자 등이 그 유형이다. 모든 질서는 지도집단이 나오면 유기적 지식인 집단이 없이 헤게모니적 질서는 창출될 수 없다. 상부구조의 측면에서 기본계급, 지도적 집단의 세계관과 의지를 형성, 결집확대시키는 역할, 즉 계급적 지배가 헤게모니적 지배가 될 수 있게 한다.
부르죠와적 세계관에 대항해 저항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고, 그것대로의 헤게모니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세계관과 이데올로기의싸움이다. 생산과정에서 노동쟁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싸움인 상황에서 유기적 지식인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자신들의 이익과 세계관을 대변할 자신들의 유기적 지식인 집단들을 창출해내야 한다. 그러한 유기적 지식인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이익을 대변하면서도 다른 계급의 이익을 포괄할 세계관과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 저항 이데올로기를 제시하여 부르죠와적 이데올로기를 파괴시키고 나중에 정치적 부분에서 승리를 거둬야 한다.
그람시는 유기적 지식인 그룹의 총체가 "당"이라고 봄으로써 당의 지도적 역할을 인정한다. 기본적으로 레닌주의적 전통속에 서구사회의 독자성을 추구하면서도 레닌주의의 틀속에서 그것을 추구하려 했다.
[편집] 그람시는 마르스크주의을 어떻게 수정해나갔는가?
그람시의 공로라고 한다면, 1920년대, 30년대에 정통적 마르스크주의들의 논리의 밑바탕에서 깔린 경제주의적 해석을 극복하려고 했던 최초의 마르스크주의이론가이다. 경제주의적 해석의 특징은 무엇인가? 환원주의와 반영주의이다.
환원주의는 상부구조의 영역(정치문화등)에 해당하는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경제적 요인에 환원시켜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이에 저항한 인물들이 루카치(계급의식의 중요성)와 그람시(정치, 문화, 이데올로기를 독자적 자율성을 갖는 영역으로 인식)이다. 반영주의는 국가는부르죠와 계급의 이익을 반영하는 도구적 기구라는 식으로 토대적인 것을 반영하는 기구로서 해석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Marx는허위의식이고 그 자체는 물질성을 갖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람시에게서 이데올로기는 토대를 그대로 반영하고 피동적/비물질적인 것이아니라 그 자체의자율성을 갖는 것이다 . Marx의 기본명제 ①∼④에 주요한 수정을 가한다. 상부구조의 자율성과,이데올로기영역의 상대적 자율성, 물질성등이다.
결정론적 해석을 또한 배격한다. 역사라는 것은 인간이 배제된 어떤 객관적 힘, 관계, 구조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배격한다. 그람시에게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는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것만은 아니다. 인간의 투쟁과 노력, 승리와 패배속에서 만들어지는것이다. 그람시는 마르스크주의이기에 자본주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를 부인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본주의의 강고성과 노동자 계급의 패배를 바라보면서 상당한 기간의 노력을 통해서야 사회주의적 질서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여긴다. 단순한 기계론적 과학주의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편집] 영향
[편집] 그에게 영향을 준 사상가
[편집] 영향을 끼친 사상가
- 페리 앤더슨
- 마이클 하트 와 안토니오 네그리
- 루이 알튀서
- 데이빗 하비
- 에드워드 사잇
- 노암 촘스키
- 스튜어트 홀, Stuart Hall
- Raymond Williams
- Judith Butler
- Ernesto Laclau & Chantal Mouffe
- Pier Paolo Pasolini
[편집] 참고 문서
- 상부 구조
- 개량주의
- Articulation (sociology)
- Risorgimen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