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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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년 7월 3일 - 1924년 6월 3일)는 체코의 유대계 소설가이다. 현재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토)에서 유대인 부모의 장남으로 태어나 독일어를 쓰는 프라하 유대인 사회 속에서 성장했다. 1906년 법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 1907년 프라하의 보험회사에 취업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의 유일한 의미와 목표는 문학창작에 있었다. 1917년 결핵 진단을 받고 1922년 보험회사에서 퇴직, 1924년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결핵요양소 키얼링(Kierling)에서 사망하였다. 카프카는 사후 그의 모든 서류를 소각하기를 유언으로 남겼으나,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Max Brod)가 카프카의 유작, 일기, 편지등을 출판하여 현대 문학사에 카프카의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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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카프카의 삶
[편집] 가족
카프카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프라하의 독일어를 쓰는 중간계급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콘골드(1972)에 의하면 '거대하고 이기적이고 거만한 사업가'로 그려진다. 카프카 자신에 의하면 '강하고, 건강하고, 먹성좋고, 목소리가 크고, 웅변적이고, 자기만족의, 우세하고, 끈기있고, 인간 본성의 마음과 지식이 있는 진짜 카프카'로 그려진다. 카프카는 그의 지배적인 아버지와 타협하려고 발버둥쳤다.헤르만 카프카는 야콥 카프카의 네째였는데 남부의 Osek에서 이사왔다. 오섹은 Pisek에서 가까운 유태인 마을이다. 외판원으로 몇 년 간 일한 후 그는 자신의 소매점을 열었다. 헤르만은 15명을 고용하고 남성과 여성용 장식품을 팔았다. 사업상 상표는 jackdaw(카프카의 체코어). 카프카의 어머니 율리 카프카(1856-1943)는 야콥 레비(Jakob Löwy)의 딸로 아버지 레비는 Poděbrady에서 성공한 양조업자였다. 남편 헤르만 카프카보다 교육을 더 잘 받았다.
카프카는 여섯 아이의 맏이였다. 2명의 남동생 게오르그와 하인리히가 있었는데 카프카가 6세가 되기전인 생후 15개월과 6개월때 죽었다. 또 3명의 여동생이 있었는데 가브리엘레(엘리,1889-1941), 발레리(발리,1890-1942), 오틀리(오틀라,1892-1943)였다. 평일에는 양친 다 집에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남편의 사업을 도와 하루 12시간씩 일했다. 아이들은 보모와 하인들이 돌아가며 키웠다.
카프카의 여동생들은 그녀들의 가족과 함께 Łódź ghetto로 보내졌고 그곳이나 유태인수용소에서 죽었다. 그 중오틀라는 Theresienstadt에 있는 수용소로 보내진 후 죽음의 수용소인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편집] 교육
카프카는 독일어를 제1언어로 배웠으나 체코어도 유창했다. 나중에 카프카는 불어와 그 문화도 조금 알게 되었다. 그가 좋아하는 작가중 하나는 플로베르였다. 1889에서 1893년 그는 정육시장에 있는 도이체 크나벤슐레(Deutsche Knabenschule)라는 남자초등학교를 다녔다. 이곳은 지금 프라하의 Masná 거리이다. 유태교육은 13세 때의 Bar Mitzvah 축제와 아버지와 1년에 4번 유태교 교회를 가는 것이 전부였다. 초등학교를 마친 후 엄격한 고전 지향적인 주립 김나지움(Altstädter Deutsches Gymnasium)에 입학한다. 이곳은 구시가의 킨스키 광장에 있다. 1901년 졸업시험(Matura exam)을 끝냈다.
Charles University of Prague에 입학하여 처음에는 화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2주 후 법과로 바꿨다. 장차 경력에 도움이 되는 것이었고 아버지도 기뻐했다. 또 법학은 오랜기간이 걸리는데 이 때 카프카는 독일학과 예술사를 들었다. 대학에서 레제와 레데할레 독일학생회(Lese- und Redehalle der Deutschen Studenten)라는 학생클럽에 가입했는데 문학행사와 독서 등의 활동을 하는 곳이었다. 1학년 때 막스 브로트(Max Brod)를 만났는데 평생의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저널리스트인 펠릭스 웰치(Felix Weltsch)와도 어울렸는데 그도 법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1906년 6월18일 카프카는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시민법정과 형사법정에서 1년간 의무 과정으로 서기를 했다.
[편집] 직업
1907년 11월 1일 그는 Assicurazioni Generali라는 공격적인 이탈리아계 보험회사에 들어갔서 거의 9개월 정도 일했다. 이 시기 그의 편지에 의하면 그는 그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침 8시~오후 6시까지의 근무시간 때문에 글쓰는 데 집중할 수 없었다. 1908년 7월 15일 관두고 2주 후 보다 마음에 드는 보헤미안 왕국의 노동자 사고 보험회사에 들어갔다.그는 보험 담당관으로서의 그의 일을 브로트베루프(Brotberuf)라고 종종 말했는데 밥벌이란 뜻이다. 그러나 그는 그 일에 무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직장 생활 동안 몇 번의 승진이 그가 열심히 일했음을 말해준다. 이 시기 그의 삶은 많이 알려지진 않았는데, '미래사회의 경영'으로 유명한 피터 드러커의 증언에 의하면 카프카는 안전헬멧을 발명했다. 1912년 이 일로 메달을 받았다. 보헤미아 왕국의 강철 밀 기계(steel mill) 사망률을 1000명당 25명까지 낮췄기 때문이다. (그는 연례 보고서를 편집, 작성하는 일도 맡았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 사본을 친구들에게 보낼만큼 자부심이 있었다.) 병행하여 카프카는 문학작업도 해나갔다. 가까운 친구 막스 브로드, 펠릭스 웰치와 함까 세 사람은 '친밀한 프라하 동아리(Der enge Prager Kreis)'로 불리웠다.
1911년 여동생 엘리의 배우자인 카를 헤르만이 카프카에게 석면공장(프라하 석면 헤르만 회사)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카프카는 처음에는 많은 자유시간을 그 일에 할애하며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시기 그는 이디시 극장(Yiddish theatre)의 공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막스 브로트는 이디시 극장에 대해 카프카를 염려했다. 그는 그 밖의 카프카의 모든 일에 지지를 보냈었다. 이 공연은 카프카가 유대이즘과 관계를 키워 가게 된 시작점이었다.
[편집] 만년
1912년 그의 평생 지기 막스 브로트의 집에서 카프카는 펠리체 바우어를 만났다. 그녀는 속기용 구술 녹음기 회사를 위해 베를린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 후 5년간 상당량의 서신왕래를 하였고 종종 만났다. 두 번 약혼했고 1917년 그들은 헤어졌다.
1917년 카프카는 결핵을 앓기 시작했다. 회복을 위해 쉬는게 필요했고 가족들, 특히 그의 셋째 누이 오틀라가 그를 돌보았다. 그 자신은 자신이 육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남들에게 혐오스럽게 인식될까봐 걱정했다. 그러나 그는 소년같고 깔끔하고 꾸미지 않은 외모, 조용하고 멋진 태도, 꽤 지적이고 천연덕스러운 유머로 다른 사람들에게 인상을 남겼다.
1920년 대 초반 그는 체코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밀레나 예젠스카(Milena Jesenská)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1923년 그는 가족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글쓰기에 집중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잠깐 가 있었다. 베를린에서는 도라 디아만트와 함께 살았다. 그녀는 정통 유태교 집안 출신으로 유치원 교사였다. 그녀는 게토에서 벗어날 만큼 충분히 독립적이었다. 도라는 그의 연인이 되었고 카프카가 탈무드에 관심을 갖게 하는데 영향을 줬다.
카프카가 임상적인 우울증과 사회불안증을 알았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동의되고 있다. 그는 또 편두통, 불면, 변비, 부스럼과 불안정을 앓았는데 보통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랬다. 그는 채식주의나 멸균되지 않은 우유(이 우유는 아마 결핵의 원인이 되었을 것)의 대량 음용 등 자연요법 처방을 통해 여러 병에 대처하려 했다. 그러나 결핵은 악화되었다. 그는 프라하로 돌아왔다. 그 다음 비엔나에서 가까운 결핵요양소에 갔고 그 곳에서 1924년 6월 3일 사망했다. 보기에 굶주림이 원인인 듯 하다. 카프카의 목의 상태는 음식을 먹으면 너무 아픈 상태였다. 정맥영양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때라 영양공급을 할 방법이 없었다. (변신의 그레고르나 단식광대의 주인공과 닮은 운명이다) 그의 유해는 프라하로 보내져서 1924년 6월 11일 매장되었다. 프라하-지즈코프( Prague-Žižkov)에 있는 신유태묘지에 매장되었다.
[편집] 개인적인 면
카프카는 공식적인 종교에 대해 전생애에 걸쳐 무관심했다. 그의 글에서 유태인으로서의 특성을 결코 나타낸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태인 뿌리를 당황스럽게 여기지는 않았다. 지적으로 하시디즘(유태교 신비주의의 하나)이 그의 맘을 강하게 끌었다. 특히 초월적이고 신비주의적 경험 같은 면 때문에 그랬다. 생애 마지막 10년간에는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할 생각도 있다고 말했다. '판결', '화부', '단식광대', '시골 의사' 등에 나타난 윤리적 절차적 진퇴양난의 상황은 법과 정의 같은 것에 관련된 랍비교의 가르침에 대한 카프카의 관심을 담고 있다. '가수 요제핀'에서의 논쟁적 해설자의 웃길만큼 세심한 스타일은 랍비 말의 수사적 관습을 감춰준다.
[편집] 카프카의 문학 세계
카프카는 생전에 단지 몇 편의 단편을 발표했다. 이는 그의 작품 중 일부이다. 그의 대부분 작품은 미완성이다.(아마 예외는 변신일 것이다.) 그의 작품은 그가 죽을 때가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죽기전 그의 친구이자 문학적 유산 관리 집행인인 막스프로트에게 그의 손으로 쓴 원고를 모두 파기시켜달라고 시켰다. 그의 연인 도라 디아만트는 부분적으로 그의 바램대로 집행하였다. 사실 그녀는 20편의 노트와 35편의 편지를 비밀리에 숨겨가지고 있었으나 1933년 게슈타포에 압수당했다. 이 유실된 원고에 대한 국제적인 조사가 진행 중이다. 어쨋던 막스 브로트는 카프카의 유언을 어기고 그가 갖고 있던 많은 작품을 출간하게 감독했다. 출간된 작품은 곧 주목받기 시작했고 평론가들의 좋은 평을 받았다.
카프카의 모든 출판된 작품은(밀레나 예젠스카에게 체코어로 쓴 몇편의 편지를 빼고) 독일어로 쓰여졌다.
[편집] 문체
프라하에서 태어난 카프카는 체코어에 유창했다. 그러나 그는 프라하 독일어로 저술했다. 프라하 저술어는 보헤미아의 수도인 그곳의 유태인과 비주류인 기독교인들이 쓰는 언어였다. 그는 프라하 독일어가 고지독어 (High German) 보다 진실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프라하 독일어를 잘 사용하므로써 그는 그의 작품을 완전히 그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독일어로 글을 쓰면서 (한페이지를 다 차지하는 긴 문장을 쓸 수도 있다.) 카프카는 마침표 바로 앞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문장의 박력을 종종 주기도 했다. 그런 박력은 의미와 강조점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번역자가 직면하는 또 다른 거의 극복할 수 없는 문제는 그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단어를 집중적으로 썼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가 독일어 단어 'Verkehr(위키번역자주:교통,교류,성교)'를 "판결" 마지막 문장에 쓴 경우를 들 수 있다. 이 문장은 "그 순간 끝없는 교통행렬이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와 같이 번역될 수 있다. 이런 명백히 이중 의미를 지닌 'Verkehr'란 단어를 쓴 이유는 카프카의 고백에 의하면 이렇다. 그의 친구이자 전기작가인 막스 브로트에게 한 고백에 따르면 그는 "격렬한 사정'을 생각하며 썼다는 것이다. 물론 영어 번역에서는 '교통'이란 번역밖에 다른게 뭐가 있겠는가?
한 작가의 삶이 물론 그의 문학 창작에 경우에 따라서는 큰 역할을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카프카의 길지 않은 삶의 여정은 그의 문학 세계의 섬세한 면을 이해하는데 적지않은 도움을 준다. 그의 문학 창작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을 대충 간추려 본다면 가족관계, 특히 아버지상, 그의 약혼녀 펠리스 바우어, 유대인의 주체의식 등을 들 수 있겠다. 문학비평의 측면에서는 자주 거론된 "삶의 의미 추구"에 관한 문제를 여기서 짧게 손꼽을 수 있겠다.
[편집] 삶의 의미 추구
[편집] 비평가의 해석
[편집] 카프카와 펠리체 바우어 (Felice Bauer)
카프카는 펠리체 바우어와의 첫대면 (1912년 8월 13일)을 그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 아가씨 F.C. 내가 8월 13일 브로트집에서 식탁에 앉아있는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는 마치 식모와 같은 인상을 주었다. 난 그녀가 누군지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고, 그녀의 존재에 대해 곧바로 나름대로 정리를 하였다. 브라우스를 걸쳐 입은 모습이 아주 가정적으로 보였으나, 잠시후 그녀는 이 인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울퉁하고 빈 얼굴은 공허 그대로였으며, 삐뚤어진 코, 약간 무디고 매력없는 금발, 거센 턱. 식탁에 마주 앉으면서 그녀를 처음으로 자세히 눈여겨 보면서 나는 그녀에 관해 확고한 판단을 내렸다...
펠리체 바우어가 이 짧은 기록에서 마치 카프카 소설의 한 인물처럼 묘사된 것에서 우리는 그녀의 존재가 카프카의 삶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는지 아마 미루어 짐작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 첫대면 후 카프카는 그야말로 억제할 수 없는 창작열에 사로잡히게 된다. 약 한달 후 그는 하루밤 사이에 (9월 23일) 유명한 단편 "판결"을 써서 펠리체 바우어에게 받치게 된다.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수도 없이 써 보낸 편지는 훌륭한 서한문학으로 평가됨과 동시에, 오늘날 카프카의 섬세한 문학세계를 이해하는데 좋은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펠리체 바우어는 카프카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으로서 카프카를 알게된 당시 독일의 베를린에 거주하는 사무여직원 이었다.
[편집] 삶의 의미 추구
[편집] 출판 이력
[편집] 저작
[편집] 장편
- 아메리카 (Amerika 혹은 실종자 Der Verschollene)
- 소송 (Der Prozess)
- 성 (Das Schloß)
[편집] 중편
[편집] 단편
- 판결 (Das Urteil) http://www.gutenberg.org/etext/7849
- 지방에서의 결혼예식 (Hochzeitvorbereitungen auf dem Lande)
- 관찰 (Betrachtung)
- 변신 (Die Verwandlung) http://www.gutenberg.org/etext/5200
- 유형지에서 (In der Strafkolonie)
- 단식 예술가 (Der Hungerkünst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