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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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箕子朝鮮)은 단군조선에 이어 기자가 세웠다는 나라로, 그 존재나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다. 현재 기자조선을 보는 관점은 대체로 다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 대부분의 사학자들에 의하여 제시되는 의견으로 기자조선의 존재 자체를 아예 부정하거나, 실제로 있었다고 하더라도 주변에의 영향은 미약했을 것이라는 관점[1]
- 단군조선에 이어 기원전 12세기 말부터 기원전 2세기 초까지 약 1천 년 간 기자(箕子)와 그 후손이 만주에서 평양에 이르는 지역을 다스렸다는 관점
- 고조선의 서쪽에 위치한 작은 제후국으로 보는 관점(윤내현)
- 기자조선이 기원전 323년 경에 기자의 후손인 기후가 번한(番韓)의 임금이 된 후에 자칭 왕이라 칭한 불조선이라 하는 관점[출처 필요]
고려, 조선시대에는 대체로 기자조선을 인정하였으나 기자의 동래에 대해서는 시대에 따라 논란이 있었고, 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그 존재 자체도 의심하게 되었다. 1980년대에는 대한민국 교과서에 한씨조선(韓氏朝鮮)과 관련하여 간단히 언급되기도 하였으나 이후 삭제되었고, 최근에는 그 위치와 영역, 존재여부, 성격 등 여러 사항에 대하여 논란이 있다.
목차 |
기존 문헌의 기록
기자조선은 중국의 《사기》〈송미자세가〉, 《한서》〈지리지〉, 《위략》《삼국지》〈위서〉동이열전, 《삼국지》〈위서〉동이전 등의 사서에 관련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사서마다 차이가 있지만 그 내용을 정리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 기자조선을 세운 이는 성은 자(子), 이름은 서여로, 상나라 왕의 후손이다. 일반적으로 원래의 이름 대신 '기자(箕子)'로 불리운다.
- 기자는 상나라 걸왕의 태사(太史)로, 왕의 정치에 대해 간하다가 옥에 갇히었다.
-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하고 기자를 옥에서 풀어주었다.
- 기자는 주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여 5천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의 영토로 망명하였다.
- 그 후에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으나 기자는 끝내 주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았다.
- 기자는 후일 주 무왕을 찾아 홍범구주를 설명하였다.
시대에 따른 기자조선에 대한 관점
《단군》[2]에 수록된 박광용의 〈단군인식의 역사적 변천 - 조선시대 -〉의 내용을 참조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시대
기자에 대한 내용이 《삼국유사》에 소개되었다. 주나라에서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것이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계승의식이 체계화되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기자를 은나라와 주나라의 태사로서, 기자조선은 두 나라의 스승의 나라로서 인식하였다. 기자는 단군과 더불어 매년 제를 지냈으며, 기자의 행적을 칭송하는 가묘를 세우기도 했다. 여러 학자들은 기자조선에 대한 기록을 책으로 저술하였고, 만주 중심의 사관을 가졌던 안정복, 김광은 기자조선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 인식의 변천
- 초기 -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에서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국호 사용을 제시하였다. 이후 출간된 《동국사략》, 《삼국사절요》에도 동일한 체계를 사용하였다.
- 중기 - 16세기 이후로 등장한 사림파의 영향으로 17세기에는 중국의 하.은.주 3대의 역사를 강조하면서 이와 연관된 기자조선-마한-신라의 계승만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단군-부여.고구려.백제의 북방계와 기자-마한-신라의 남방계의 두 주류 모두를 인정하는 것이 대부분의 의견이었다.
- 후기 - 안정복은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삼한으로 정리하여, 초기의 체계를 인정하였다. 대한제국 이후의 계몽기 사서들은 단군-기자-마한-삼국-통일신라-고려의 계승을 수록하였다.
- 기자의 행적에 대한 논란
조선시대의 논란은 주로 사서 내용의 불일치에 대한 것이었다. 주의 무왕을 피해 조선에 자리잡은 기자는 주나라에 돌아가지 않았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장유, 홍직필 등)[3]
일제 강점기
중국의 사서인 상서대전, 사기, 한서 등의 내용을 근거로 기자가 이끄는 상나라 유민들이 조선 땅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기자동래설'이 부정되었다. 기자조선의 존재 부정 또는 한민족과 관련이 없음을 주장하려는 시도는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시라토리, 이마니시 등)에 의해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를 말살하기 위한 의도로 시작되었다. 일본의 학자들은 기자동래설은 후대에 꾸며낸 허구이며 실제로 존재했더라도 중국에서 기원했으므로 중국인이 세운 나라로 조선과는 관계없음을 주장하였다.[4]
광복 이후
광복 이후로는 기자조선에 대한 여러 의견이 제시되었다. 대한민국 학계에서는 한 때 기자조선의 가능성을 인정하여 교과서에 언급하기도 하였으나, 대체적으로는 인정하지 않는 추세이다. 최근에는 발굴된 유적을 근거로 상나라의 후예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발해 근방에 정착했고, 고조선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에 대한 주장이 제기되었다. 북한 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을 날조된 역사로 여겨 인정하지 않는다.[5]
기자조선에 대한 현재의 관점
현재 제시되어 있는 기자조선에 대한 여러 관점들은 다음과 같다.
부정론
이 주장은 기자조선은 기자조선은 신화이며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기자조선 부정론 근거
기자조선이 부정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 한나라 시기 이후의 사서에는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내용이 나타나지만 서기전 3세기 이전의 사서(논어, 죽서기년)에 기자는 수록되어 있으나 조선으로 갔다는 내용은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죽서기년에는 "기자가 상나라 마지막 왕인 주에 의해 감옥에 갇히고 상나라가 멸망하고 주나라가 건립된 후 주나라 무왕16년에 기자가 주나라 왕실에 조근하였다"라고 기록했을 뿐이다. 즉 최초의 중국 통일 왕조인 진(秦)나라 이전의 기록에는 기자가 조선에 갔다는 기록이 없었는데 한(漢)나라에 이르러 사서에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나타나며 이는 기자동래설의 조작가능성을 시사해준다.
- 황하 문명의 청동기와 요서 동쪽의 청동기가 크게 다르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중국의 청동검과 고조선의 비파형청동검은 큰 차이가 있다. 중국식동검은 손잡이와 칼날이 일체형으로 제작되어있지만 고조선의 비파형동검은 칼날과 손잡이 그리고 장식부분 등 3가지로 구성된다. 특히 주석함유량이 중국식동검에 비하여 월등히 높다.
- 은나라 사람인 기자가 고조선에 예의와 문화를 전했다고 하는데, 고조선의 영토로 추정되는 영역에서 은나라에서 출토된 갑골문자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
- 중국 진나라의 두여(杜여)는 기자의 무덤이 중국 하남성 몽현(蒙懸)에 있다고 하였다.[6] 기자의 묘라고 전해지는 묘가 중국에 있다.
- 고려의 통치자들은 1102년(숙종 7년)에 기자의 무덤을 찾아내고 사당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평양 토산(금수산 모란봉의 한 지맥)에 있던 '기자묘'는 이렇게 생겨난 것이었는데 1950년대 북조선 학자들이 발굴해보니 사기조각 몇개밖에 나온 것이 없었다.[7]
- 단대공정 이후 중국 학자들이 주장하는 주나라 무왕의 재위 연대는 약 BC1046년에서 BC1043년으로 기자가 이시기에 조선으로 건너왔다는 것과 기자조선이라고 불리는 후조선의 첫번째 임금인 태조왕과의 연대차이가 80년정도 난다.
- 주나라 호왕은 사마천이 지은 사기의 주본기를 비롯한 모든 사서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 기자의 묘가 현재 중국의 산동성에서 발견되었다[1]. 이는 아직도 그 진위여부가 문제가 되고 있는 환단고기중 단군세기 기록인 "기자가 서화(西華)에 옮겨가 있으면서 인사(人事)를 받는 일도 거절하였다(箕子徙居西華 謝絶人事)"라는 문구가 뒷바침해준다.
- 규원사화에서는 단군의 고조선에 이어 치우의 자손의 나라인 남국(藍國)이 고조선을 이어 해대와 회대 지역으로 불리었던 중국의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까지 확장하고 한때에는 빈과 기라고 불리었던 황하강 상류에까지 그 세력을 확장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기자(箕子)라는 호칭에 대하여 각 사서의 설명이 다르다. 첫번째 설명으로는 기자의 성은 "자(子)"씨이고 기국(箕國)의 자작(子爵)의 칭호를 받았기때문에 기자(箕子)라고 부른다고 한다. 두번째 설명으로는 기자는 성은 "기(箕)"씨이며 사상가이므로 기자라고 불렸다고 한다.
- 기자동래설은 사마천이 쓴 사기의 아래 구절을 근거로 하는데 "於是武王乃封箕子於朝鮮而不臣也"라고 쓰여있다. 번역하면 "이에 주나라 무왕은 기자를 조선에 봉했으나 신하가 되지는 않았다"이다. '봉(封)'한다는 말은 임금이 신하에게 영지를 주고 제후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사기의 기록은 다시 말하면 주나라의 "무왕이 기자에게 영토를 주어 제후국으로 삼았으나 제후가 되지는 않았다"이다. 이는 문장 자체가 모순이다.
- 1951년 산동성 황현(黃縣) 남부촌(南埠村)에서 8점의 기기(箕器)가 출토되었고, 1969년에는 산동성 연대시(烟臺市) 남쪽 교외에서 기후정(箕候鼎)이 출토되었다.
- 사서마다 기자를 봉한 왕이 일치 하지 않는다. 삼국유사에는 주나라 호왕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상서대전에는 주나라 무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긍정론
기자동래설은 사서의 내용을 근거로 기자가 이끄는 은나라 유민들이 조선 땅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주장이다.
기자조선의 근거
제시된 기자동래 및 기자조선의 실재에 대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 고려시대 이전에 고조선의 역사를 설명한 사서인 삼국유사에 따르면 단군조선은 요임금과 같은 시기(기원전 2333년경)에 세워져 약 1500년간 지속되었고, 이후 주나라의 호왕(虎王)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여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돌아와 아사달에 숨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단군조선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기록을 전하는 규원사화는 단군조선이 1195년간(실제로는 1205년) 지속되었다고 기술하여 기원전 1128년 이후에 기자조선이 세워졌을 개연성을 뒷받침해준다.
- 조선 시대에는 초기부터 41대 1천 년 간의 기자조선의 존재를 기정 사실로 받아들였다. 많은 학자들이 기자조선을 연구했으며, 세조 때에 편찬된 동국통감, 영조 때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 등 거의 모든 사서에 기자조선의 내용이 기록되었다.
- 각 시대의 사서에 기록된 조서와 사신의 글에서 중국과 만주의 나라들은 기자조선을 언급하여 기자조선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 삼국사기에 인용된 신당서의 기록에는 '고구려에서 일신(日神), 기자.가한신(箕子可汗神)에게 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唐書云 高句麗俗多淫祠 祀靈星及日箕子可汗等神 國左有大穴 曰神隧 每十月 王皆自祭"
- 기자가 이동한 경로에 해당되는 발해만 북쪽(대릉하)에서 해당 시대의 '기(箕)'자 명문이 새겨진 그릇을 비롯한 다양한 제사용 청동 그릇들이 30여점 발굴되었다. - 1973년 중국 요녕성(遼寧省) 객좌현(喀左縣)에서 '기후(箕候)'와 '고죽(孤竹)'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방정(方鼎) 등 청동 예기(禮器) 6점이 출토되었다. 이들 유물의 제작 시기는 은나라 말기이므로 기자(箕子)의 생존 시기와 일치한다. 기자가 자신의 족속들을 데리고 피신한 곳으로 추측되는 지역은 난하(爛河)와 대릉하(大陵河) 사이의 객좌현으로, 하북성(河北省) 노룡현(盧龍縣)에서 멀지 않은 지역이다
- 동사강목의 기자강역고에서는 월정 윤근수의 주장을 인용하여, 기자묘는 요동의 광녕성 북쪽에 있었다고 하였다.
천관우는, 기자가 이끄는 집단이 고조선과 주나라의 접경지대인 요서 지역에 정착하여 청동기 문화를 발전시켰고, 연나라의 확장에 밀려 요동을 거쳐 대동강 유역까지 이동했다고 주장하였다.
기자조선의 역년 및 치세
조선 중기까지의 기자조선의 기록은 중국 사서의 기자의 기록과 마지막 왕인 준왕의 기록이 대부분을 이루다가 조선 말기에는 41대의 왕의 명칭과 치세기간이 나타나게 되는데, 참조를 위해 조선시대 ~ 일제강점기 초기의 저술연대가 명확한 사서에 기록된 내용을 정리한다.
《기자지》, 《태원선우씨세보》에는 가덕왕 이전의 왕이 추존왕이로 등록되어 기자조선의 각 왕의 명칭과 치세기간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동사강》과 그 역년이 같다. 명칭은 약간의 차이가 있어서, 대동사강의 위덕왕(威德王)과 창덕왕(昌德王)이 《태원선우씨세보》에는 성덕왕(盛德王)과 덕창왕(德昌王)이라 기록되어 있다.
《기자지(箕子志)》와 《대동사강》에 기록된 기자조선 역대 왕의 역년은 다음과 같다.
- 태조문성왕(太祖文聖王) 기자. 자서여. 재위 기원전 1126년 - 기원전 1082년
- 장혜왕(莊惠王) 송. 재위 기원전 1082년 - 기원전 1057년
- 경효왕(敬孝王) 순. 재위 기원전 1057년 - 기원전 1030년
- 공정왕(恭貞王) 백. 재위 기원전 1030년 - 기원전 1000년
- 문무왕(文武王) 춘. 재위 기원전 1000년 - 기원전 972년
- 태원왕(太原王) 공. 재위 기원전 972년 - 기원전 968년
- 경창왕(景昌王) 장. 재위 기원전 968년 - 기원전 957년
- 흥평왕(興平王) 재위 기원전 957년 - 기원전 943년
- 철위왕(哲威王) 조. 재위 기원전 943년 - 기원전 925년
- 선혜왕(宣惠王) 삭. 재위 기원전 925년 - 기원전 896년
- 의양왕(誼襄王) 사. 재위 기원전 896년 - 기원전 843년
- 문혜왕(文惠王) 염. 재위 기원전 843년 - 기원전 793년
- 위덕왕(威德王) 월. 재위 기원전 793년 - 기원전 778년
- 도회왕(悼懷王) 재위 기원전 778년 - 기원전 776년
- 문열왕(文烈王) 우. 재위 기원전 776년 - 기원전 761년
- 창국왕(昌國王) 재위 기원전 761년 - 기원전 748년
- 무성왕(武成王) 평. 재위 기원전 748년 - 기원전 722년
- 정경왕(貞敬王) 궐. 재위 기원전 722년 - 기원전 703년
- 낙성왕(樂成王) 회. 재위 기원전 703년 - 기원전 675년
- 효종왕(孝宗王) 존. 재위 기원전 675년 - 기원전 658년
- 천노왕(天老王) 효. 재위 기원전 658년 - 기원전 634년
- 수도왕(修道王) 배. 재위 기원전 634년 - 기원전 615년
- 휘양왕(徽襄王) 재위 기원전 615년 - 기원전 594년
- 봉일왕(奉日王) 삼. 재위 기원전 594년 - 기원전 578년
- 창덕왕(昌德王) 근. 재위 기원전 578년 - 기원전 560년
- 수성왕(壽聖王) 삭. 재위 기원전 560년 - 기원전 519년
- 영걸왕(英傑王) 재위 기원전 519년 - 기원전 503년
- 일민왕(逸民王) 강. 재위 기원전 503년 - 기원전 486년
- 제세왕(濟世王) 혼. 재위 기원전 486년 - 기원전 465년
- 청국왕(淸國王) 재위 기원전 465년 - 기원전 432년
- 도국왕(導國王) 증. 재위 기원전 432년 - 기원전 413년
- 혁성왕(赫聖王) 재위 기원전 413년 - 기원전 385년
- 화라왕(和羅王) 재위 기원전 385년 - 기원전 369년
- 설문왕(說文王) 하. 재위 기원전 369년 - 기원전 361년
- 경순왕(慶順王) 재위 기원전 361년 - 기원전 342년
- 가덕왕(嘉德王) 재위 기원전 342년 - 기원전 315년
- 삼로왕(三老王) 재위 기원전 315년 - 기원전 290년
- 현문왕(顯文王) 석. 재위 기원전 290년 - 기원전 251년
- 장평왕(章平王) 재위 기원전 251년 - 기원전 232년
- 종통왕(宗統王) 자부. 재위 기원전 232년 - 기원전 220년
- 애왕(哀王) 기준. 재위 기원전 220년 - 기원전 195년
제후국론
윤내현 교수로 대표되는 주장이며, 기자조선이 고조선의 서쪽에, 즉 지금의 요서지역에 위치한 분국으로 제후국에 지나지 않았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은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주장한 내용과 비슷하다. 즉, 기자조선은 기자의 자손인 기후가 BC323년에 고조선의 제후국인 불한 혹은 번한(番韓)의 왕이 된 후를 일컫는 것이다.
제후국론 근거
- 기원전 323년 경에 번한(番韓)의 임금이 기자의 후손이 된 후에 자칭 왕이라 칭한 번조선을 기자조선이라 불렀다는 주장이다.
-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불한 조선후(朝鮮侯) 기씨(箕氏)가 신한(辰韓) 조선왕 개씨(諧氏)를 배반하고 스스로 신한이라 일컬어서 삼조선 분립의 판국을 열었는데, 불한이 신한을 일컬은 것이 연(燕)이 왕을 일컬은 뒤요, 연이 왕을 일컬은 것은사기 에 주(周) 에 신정왕 46 년, 기원전 323 년이니 신말불 삼조선의 분립이 기원전 4 세기 경임을 확증하는 것이고, 대부례는 대개 불한의 유력한 모사(謨士)니, 불한을 권하여 신한을 배반하고 역시 신한이라 일컫게 하고, 연과 결탁하여 동서 두 새 왕국을 동맹하게 한 이가 또한 대부례이니 대부례는 삼조선 분립을 주동한 중심 인물일 것이다."
- 쉽게 말하면 고조선은 신한(혹은 진한)이 다스렸고 고조선의 제후(諸候)중에 불한이 있었는데 기원전 323년 경에 이르러 기자의 후손인 기후가 불한이 된 이후에 고조선의 신한을 배반하고 스스로 진한이라 일컬었다는 것이다. 즉, 기원전 323년 경에 기자의 자손인 기후가 고조선의 제후국인 불한의 임금이 된후 고조선의 신하국이 될 것을 거부하여 기자조선이라 일컬었다는 것이다.
- 한순근(법무사)은 태원선우씨세보에 나타난 기자조선의 역대왕들에 대하여 <고기로 본 한국 고대사>에서는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 "위 기자조선세계 문구에는 문성대왕이 36세 가덕왕(휘 후)때 왕으로 추존되었다고 적혀 있다. 이를 보면 현존하는 기자조선세계에 적혀 있는 가덕왕 이전 왕들은 모두 가덕왕 때 왕으로 추존된 수유족의 우두머리들이다(三十六世嘉德王追尊爲王). 그리고 문성대왕이 시조로 적혀 있는 것은 문성대왕이 수유족의 시조였기 때문이 아니라 앞에서 말한 것처럼 '기후가 칭왕한 후 수유족 우두머리들을 모두 왕으로 추존하였는데, 사대주의 사상이 강한 중세조선 때 그 세계를 다시 만들면서 그 세계를 빛내기 위하여 기자조선의 시조를 왕검조선에서 번한을 지낸 서우여 대신에 중국에서 동래한 기자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 즉, 이의 설명에 따르면 '36세 가덕왕(이름은 기후이다) 이전의 왕들은 실제 존재한 왕이 아니라 기후가 왕이 된 후에 기후의 조상들을 왕으로 지칭한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자조선의 역년과 치세는 아래에서도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 왕이라는 칭호를 쓰게된 때는 적어도 기원후이다. 그러나 기자조선의 역년표를 보면 기원전 1000년부터 왕이라는 칭호를 쓰고 있는것으로보아 한순근의 고기로본한국고대사의 설명대로 후대의 위작이라고 볼수있으며 왕의 이름들도 기원후600년 이후에나 볼 수 있는 한자식 이름이 많이 있으며 얼핏보기에 조선왕들의 이름처럼 보인다. 태원선우씨세보에도 36세 가덕왕 이전은 추존왕이라고 진술하고 있으며 가덕왕 이전은 실제로 존재한 왕이 아니라 가덕왕의 선조를 왕으로 명칭한것이다.
-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기자는 조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기국(箕國)의 제후를 가리킨다는 견해이다.
기타 주장
- 기자조선은 요서 지방에 있었으며, 춘추시대 말기에 소멸되었다는 주장(이기백).
- 유적이나 유물로 보아 기자의 후손이 요서 지방에 살았던 것은 맞지만, 연나라에 복속된 작은 나라였다는 주장(송호정).
- 기자조선의 실재를 인정하는 학자 중에는 기자가 상나라의 유민이기 이전에 한민족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출처 필요]
각주
- ↑ 한순근, 고기로 본 한국 고대사 (기자조선편 개설)
- ↑ 《단군》,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4
- ↑ 이상시, 檀君實史에 관한 文獻考證, 고려원, 1990
- ↑ 이상시, 檀君實史에 관한 文獻考證, 고려원, 1990
- ↑ 허종호, 《고조선력사개관》, 사회과학출판사 남- 도서출판 중심 펴냄, 2001
- ↑ 《단군과 고조선 연구》, 단군학회 엮음, 지식산업사, 2005년, 266쪽
- ↑ 《단군과 고조선 연구》, 단군학회 엮음, 지식산업사, 2005년, 266쪽
- ↑ 네이버 백과사전
참고문헌 및 링크
- 김부식, 《삼국사기》
- 정인지, 《고려사》
- 《조선왕조실록》
- 정인기, 《기자지(箕子志)》, 1879
- 이이, 《기자실기(箕子實記)》, 1580
- 허목, 《기자세가(箕子世家)》, 숙종대
- 이종휘, 《기자세가》, 1805
- 오명제, 《조선세기》, 명나라
- 김광, 《대동사강(大東史綱)》, 대동사강사, 1926
- 선우덕(鮮于悳), 《태원선우씨세보(太原鮮于氏世譜)》, 태원선우씨세보소, 1932
- 천관우, 《箕子攷》, 연세대학교 동방학지 15집, 1974
- 이상시, 檀君實史에 관한 文獻考證, 고려원, 1990
- 이형구, 한국학지식 - 기자조선
- 노태돈, 한국학지식 - 기자동래설
- 박광용, 〈단군인식의 역사적 변천 - 조선시대 -〉, 《단군; 그 이해와 자료》, 종교문제연구소,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4
- 한순근, 《고기로 본 한국 고대사》, 새암출판사, 1997[2]
- 신채호, 《조선상고사》, 종로서원, 1948 [3]
- 허종호, 《고조선력사개관》, 사회과학출판사 남- 도서출판 중심 펴냄,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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