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목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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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종(穆宗, 980년 - 1009년)은 고려의 제7대 왕(재위: 997년 - 1009년)이다. 휘는 송(訟), 자는 효신(孝伸), 시호는 목종위혜극영정공선양대왕(穆宗威惠克英定恭宣讓大王). 경종과 천추태후(千秋太后) 황보씨(皇甫氏)의 아들이다.
[편집] 생애
980년에 태어난 그는 경종이 승하할 당시 불과 2살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왕위는 성종에게도 이어졌다. 하지만 아들이 없던 성종은 왕송을 궁중에서 양육하여 990년에 개령군(開寧君)에 봉했다. 그리고 개령군은 997년, 병으로 누워 임종을 앞둔 성종의 내선으로 왕위에 오른다. 그가 곧 목종이다.
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의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빌미삼아 모후인 천추태후가 섭정을 실시했다. 정권을 거머쥔 천추태후는 곧 자신의 정부 김치양을 불러들인다. 김치양은 성종 때에 천추궁을 출입하면서 천추태후와 정을 통하다가 이 일이 발각되어 장형을 당하고 귀양중에 있던 상태였다.
김치양을 불러들인 천추태후는 정치를 자기 마음대로 처리하였다. 또한 김치양과 버젓이 부부 행세를 하며 간통을 하고 아들까지 낳게 된다.
김치양은 등용된 지 몇 년도 되지 않아 우복야(右僕射) 겸 삼사사(三司使)에 오르고,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이렇게 되자 전국에서 벼슬을 원하는 자들이 뇌물을 가지고 그의 집으로 몰려들었으며, 그는 거두어들인 뇌물로 300칸이나 되는 대저택을 짓고 정원에 수많은 정자와 연못을 만들어 밤낮으로 천추태후와 놀아났다.
또한 김치양은 자신의 사당을 짓기 위해 백성들을 부역에 동원하기도 했으며, 이 때문에 백성들의 원성이 날로 높아갔다.
김치양의 권력 독점으로 조정이 기능을 상실하게 되자 목종은 그를 내쫓기 위해 여러가지 방책을 강구하지만 천추태후의 방해로 번번이 실패한다. 이렇듯 왕권을 완전히 빼앗긴 목종은 절망한 나머지 정치를 소홀히 하고 동성애를 즐기기 시작했다. 그의 동성연애 대상은 유행간이라는 인물이었다. 유행간은 외모가 남달리 아름다웠는데, 목종은 그의 외모에 반하여 남색을 즐기게 된다.
목종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 유행간을 곧 합문사인(閤門舍人)의 벼슬에 오르게 되고, 항상 목종 곁에서 정치를 농단하기 시작한다. 목종은 정치에 관한 한 유행간에게 묻지 않는 것이 없었고, 이에 따하 유행간은 마음먹은 일이면 언제든지 목종을 조정하여 이룰 수 있었다.
목종을 마음대로 다루게 된 유행간 역시 김치양과 마찬가지로 오만하고 방자한 행동을 일삼았다. 심지어는 신하들을 경멸하여 그들에게 턱과 눈빛으로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이렇게 되자 신하들은 마치 유행간을 왕처럼 떠받들게 되었다.
유행간은 권력이 강해지면서 유충정이라는 또 한 명의 인물을 목종에게 소개해주었다. 발해 출신인 유충정 역시 외모가 아름다운 덕택으로 목종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조정은 점차 유행간과 유충정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그들 두 사람은 항상 목종 곁에서 왕명을 핑계삼아 인사를 좌우하였으며, 때로는 자신들이 마치 왕인 것처럼 많은 궁인들을 이끌고 다니기도 하였다.
조정이 이처럼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가운데 1004년 그동안 김치양과 놀아나던 천추태후는 아들을 출산했다. 이때부터 김치양과 천추태후는 자신들의 아들을 차기 왕으로 않히기 위해 온갖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당시 태조의 유일한 혈통은 왕욱와 헌정왕후의 불륜의 씨앗인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뿐이었다. 천추태후의 여동생 헌정왕후는 남편인 경종이 죽은 후에 사가에 머물다가 삼촌인 왕욱과 눈이 맞아 아이를 낳았고, 이 아이가 바로 대량원군이었다.
천추태후는 자신의 이종조카인 대량원군을 없애면 김치양과 자신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왕태자로 책봉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고, 대량원군을 강제로 승려로 만들어 내쫓았다. 그리고 누차에 걸쳐 자객을 보내 그를 죽이려 했지만 그때마다 대량원군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김치양와 천추태후의 왕위를 노린 음모가 치열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목종은 병을 얻고 말았다. 원래부터 겁이 많던 그는 1009년 봄에 숭교사(崇敎寺)를 다녀오다가 폭풍을 만난 다음부터 마음이 약해졌다. 그리고 며칠 뒤 연등회 도중에 기름 창고에 불이 붙어 천추전이 불타고, 궁궐 일부와 창고마저 소실되자 슬픔에 잠겨 드러누웠다.
목종의 병세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스스로 임종이 가까웠음을 알고 한시바삐 후계자를 결정하고자 하였다. 후계자 자격을 갖춘 유일한 혈통은 대량원군뿐이었다. 하지만 유행간이 대량원군에게 선위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목종은 은밀히 채충순과 최항을 불러 차기 왕에 대해 의논하고 대량원군을 신혈사(神穴寺)에서 데려올 것을 명령하였다. 또한 전중감의 이주정이 김치양 일파이기 때문에 그를 서북면순검부사(西北面巡檢府事)로 파견하고 동시에 서경도순검사(西京都巡檢使) 강조를 불러들였다.
강조가 왕명을 받들어 서경을 출발하여 동주 용천역에 도착했을 때 내사주서(內史注書) 위종정과 안북도호장서기(安北都護掌書記) 최창이 찾아왔다. 그들은 목종의 병세가 악화되어 이미 위독한 상태이기 때문에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왕명을 날조하여 북방의 군사권을 쥐고 있는 강조를 소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강조는 그들의 말을 사실로 믿고 다시 서경으로 돌아갔다.
이때 천추태후는 강조가 개경으로 돌아오면 자신들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는 생각에 도중에서 그를 생포하기로 결정하고 군사를 배치해두었다. 그 사실은 곧 강조의 아버지에게 전해졌고, 그는 아들이 염려되어 급히 사람을 보내 ‘왕이 이미 죽고 없으니 군대를 이끌고 국난을 평정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아버지의 편지를 받아본 강조는 병력 5천 명을 인솔하고 개경으로 갔는데, 평주에 도착해서야 목종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았다. 강조는 군대를 이끌고 온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고, 결국 부하들의 건의에 목종을 폐립할 것을 결정했다.
폐립을 결정한 강조는 사람을 보내 목종에게 김치양 일파를 제거하는 동안 잠시 귀법사(歸法寺)로 피신했으면 한다는 내용의 서찰을 보냈다. 강조는 목종을 그렇게 안심시킨 다음 군대를 몰아 개경으로 진군했다. 병사들이 궁궐 안으로 밀려들자 목종은 폐위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천추태후와 함께 궁인들과 유충정을 데리고 법왕사로 피신했다.
목종이 궁궐을 빠져나가자 강조는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원군을 왕으로 세웠다. 그리고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 등 7명을 죽이고 그 도당과 천추태후의 친속 이주정 등 30명을 귀양 보냈다.
한편 법왕사로 떠난 목종은 최항을 시켜 강조에게 말을 내어줄 것을 부탁했고, 이에 강조가 말 1필을 보내주자 충주로 갔다.
하지만 강조는 뒷일을 염려하여 목종을 죽이기로 결심하고는 사람을 시켜 사약을 먹도록 강요했는데, 목종이 이를 거부하자 결국 강조의 수하들이 목종을 살해하고 자살한 것처럼 꾸몄다.
목종이 객지에서 그렇게 비명횡사하자 강조의 수하들은 문짝으로 관을 삼아 시체를 보관하고 강조에게 보고하니, 강조는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1009년 2월에 일어난 이 같은 강조의 쿠데타로 11년 4개월 동안의 목종 시대는 끝이 났다. 또한 이 사건은 현종 즉위 후 요나라가 고려를 침입하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이 때 그의 나이는 30살이었다. 능호는 공릉(恭陵)이다.
[편집] 가족 관계
- 선정왕후 유씨(宣正王后)
전 임 성종 |
제7대 고려왕 997년 - 1009년 |
후 임 현종 |
고려의 역대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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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 | 혜종 | 정종 | 광종 | 경종 | 성종 | 목종 | 현종 | 덕종 | 정종 | 문종 | 순종 | 선종 | 헌종 | 숙종 | 예종 | 인종 의종 | 명종 | 신종 | 희종 | 강종 | 고종 | 원종 | 충렬왕 | 충선왕 | 충숙왕 | 충혜왕 | 충목왕 | 충정왕 | 공민왕 | 우왕 | 창왕 | 공양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