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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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종(毅宗, 1127년 - 1173년)은 고려의 제18대 왕(재위: 1146년 - 1170년)이다. 휘는 현(晛), 자는 일승(日升), 시호는 의종강과장효대왕(毅宗剛果莊孝大王). 인종과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의 맏아들이다.
[편집] 생애
의종은 인종의 맏아들이자 세번째 아내 공예왕후의 소생으로 1127년 4월 경오일에 태어났으며, 1143년에 왕태로 책봉되었다. 1146년 2월 정묘일에 인종이 승하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 20살이었다.
의종은 어린 시절부터 오락을 좋아하였다. 특히 격구에 몰입하여 공부를 소홀히 하고 환관이나 무장들과 어울려 함께 시합을 하는 일이 잦았다. 이 때문에 모후 공예왕후는 둘째왕자 경을 왕태자로 책봉하자고 주장했으나 인종이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공예왕후는 끈질기게 그를 왕태자에서 폐하고 둘째인 왕경을 새 왕태자로 삼을 것을 간청한다. 이에 인종도 마음이 동하여 그를 폐립하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인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예부시랑 정습명이 왕태자 폐립을 반대하며 자신이 의종을 보필하여 정사를 원만히 수행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자청한다.
의종은 정습명의 보호에 힘입어 가까스로 왕태자직을 보전하다가 부왕 인종이 승하하자 그의 유지에 따라 왕위에 오른다.
이와 같이 의종의 즉위에 정습명의 역할이 지대했기 때문에 왕이 된 이후에도 의종은 정습명에 의해 철저하게 행동을 규제받는다. 의종 즉위 후 한림학사로 승격된 원칙주의자 정습명은 의종을 냉정하게 보필하여 정치 전반에 관한 자문역을 수행하였는데, 그가 너무 지나치게 자신의 행동을 규제하는 바람에 의종은 점차 그를 꺼리게 된다. 그리고 급기야 의종은 환관들을 중심으로 자신의 근위 세력을 형성하여 김존중, 정서 등을 측근으로 삼아 정습명을 정계에서 축출하여 죽여버린다.
의종 치세 초기에는 인종 때의 공신인 원로 김부식과 문하시중 임원후가 이끄는 개경의 문신 세력이 정권을 주도하고 있었는데, 의종은 이들 문신들이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규제를 하자 환멸을 느끼고 근위 세력 형성에 주력했던 것이다. 문신들은 대간들을 중심으로 정사에 관한 많은 의견을 내놓았는데 의종이 그들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으면 그것이 관철될 때까지 모두 출근을 하지 않기도 했고, 왕의 측근들에 대해서도 숱한 탄핵을 하여 기어코 그들을 축출하곤 하였다. 의종은 문신들의 이러한 지나친 간섭에 염증을 느끼고 근위 세력을 형성하여 왕권을 회복하려 했던 것이다.
근왕 세력의 중심 인물은 정함, 영의, 김존중, 정성 등으로 이들은 대개 환관 또는 환관 출신들이었다. 의종은 이들과 함께 거의 매일같이 격구를 즐기며 정사를 등한시하였다. 심지어 어떤 때는 4일 동안 줄곧 격구만 관람하여 아예 편전에 나가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의종의 이 같은 행동은 문신들의 지나친 행동 규제에 반발한 고의적인 처사였다.
이처럼 의종이 정사를 등한시하는 가운데 1147년에는 서경에서 이숙, 유혁 등이 금나라와 내통하여 반란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고, 이듬해 10월에는 이심, 지지용 등이 송나라와 공모하여 고려를 멸망시키려는 계획을 꾸미다가 체포되었다.
이처럼 반역 사건이 일어나자 대간과 신하들은 그 책임을 모두 왕이 방탕하게 생활하도록 부추긴 환관들에게 돌렸다. 문신들은 사흘 동안 무릎을 꿇고 버티며 이들을 처벌하라고 의종에게 요구했다. 결국 의종은 자신의 측근 환관 7명을 귀양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의종은 김존중과 정성을 중심으로 다시 측근 세력을 만들어 조회 때 조정에서 간관들이 직접 간언하지 못하게 했다.
의종은 문신들에 대한 반격을 이끈 김존중을 우승선으로 승진시켰다. 김존중은 이에 그치지 않고 환관 정함과 공모하여,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정서가 대령후 왕경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역모로 몰아 정서를 귀양 보내고 대령후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의종은 역모 사건을 밝혀낸 공을 인정해 환관 정함에게 합문지후의 벼슬을 내렸다. 합문지후는 환관으로서는 오를 수 없는 높은 직위였다. 당연히 문신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문신들은 고작 환관 따위에게 문관의 직책인 합문지후를 내리는 것은 있을 수 었는 일이라며 반발했고, 의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모두 힘을 모아 출근하지 않았다.
결국 문신들의 힘에 밀려 의종의 측근은 다시 한번 쫓겨나고 문신들은 의종이 격구를 보는 것도 금지시켰다. 왕에 대한 문신 세력의 간섭이 다시 거세지자 환관 이균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벌어지고 의종이 절대적으로 신임하던 김존중도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자 의종은 실의에 빠졌다.
하지만 의종의 방탕한 생활과 문신들과의 다툼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의종은 가까운 문신들을 모아 다시 세력을 키우고 환관의 힘을 키워 어사대와 대간을 견제하도록 했다.
그런 가운데 문신 세력을 이끌던 시중 임원후가 병에 걸려 죽자 그 틈을 타 의종은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동생 대령후를 귀양 보냈다.
또한 의종은 격구를 그만둔 대신 잔치를 베풀어 가까운 문신들과 함께 시를 짓고 노는 일이 잦아졌다. 의종은 연못을 파고 화려한 정자를 지었으며 이상하게 생긴 바위와 돌을 모아 절벽을 만드는가 하면 물을 끌어들여 폭포를 만들기도 했다.
측근들은 의종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위해 화려하고 귀한 물건을 발견하면 의종에게 바쳤으며 백성들의 물건이나 돈을 빼앗는 것도 서슴치 않았다.
의종은 자신의 왕권이 강해졌다는 생각이 들자 정함에게 다시 합문지후의 벼슬을 내렸고 이후 환관들의 권력은 비할 데 없이 강해졌다. 그들은 의종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흥청망청 노는 연회가 끊이지 않도록 했다. 이들은 커다란 저택을 가지고 몇십 명의 노비를 부렸으며 특히 우두머리 격인 정함과 백선연은 신하들에게 눈짓으로 명령하고 무장을 종 부리듯 했다. 의종 후반기의 정치는 한마디로 환관들이 좌우하는 환관 정치였다. 이 과정에서 무신들만을 소외시켜 천대받게 만들어 무신정변(武臣政變)의 계기를 낳았다.
의종이 문신들과 흥청거리는 동안 무신들은 경비를 서야 했다. 의종과 문신들의 잔치는 끊이질 않았고 밤이 깊도록 계속 되기도 했다. 그들이 밤새 먹고 마시며 노는 동안 경비를 서는 무신들은 배고픔과 피로함으로 지쳐 갔다.
무신들의 심기를 더욱 사납게 만든 것은 문신들의 노골적인 업신여김과 모욕이었다. 1170년 8월 29일 의종은 화평재로 나가 연회를 베풀고 문신들과 어울려 놀았다. 그러나 호위 군사들은 심히 굶주린 채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신들이 무신들에게 무례하게 굴어 무신들의 분노가 극도에 달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의방과 이고가 정중부에게 거사를 도모하자고 제안했다. 정중부는 자신의 수염을 태우는 장난을 친 바 있는 김돈중이 흥청망청 즐겁게 놀고 있는 모습을 보자 울화가 치밀었다. 그리하여 언제나 거사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의종은 환궁하지 않고 보현원으로 가서 다시 연회를 계속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다음날 보현원으로 가기 위해 오문까지 왔을 때 그는 문신들을 불러 술을 마셨다. 그리고 술기운이 한창 오를 무렵 사기가 저하된 무신들을 위로하고자 수박희 시합을 시켰다.
수박희가 시작되자 대장군 이소응과 장교 하나가 시합을 벌였다. 이소응은 힘이 약한 탓에 도중에 포기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것을 보던 한뢰가 갑자기 앞으로 나서며 도망가는 이소응의 뺨을 후려쳤다. 그러자 이소응이 섬돌 아래로 떨어져 처박혔고, 문신들이 손뼉을 치면서 이소응을 비웃었다. 이를 보다못한 정중부가 앞으로 나서며 호통을 치자 의종은 정중부를 달래며 말렸다.
황혼이 깃들 무렵 의종의 행렬이 보현원 근처에 이르렀을 때 이고와 이의방은 마침내 행동을 개시했다. 우선 그들은 왕명이라고 속여 순검군사들을 한 곳에 집결시켰다. 그때 의종은 막 정자 안으로 들어섰고, 문신들은 밖으로 나오며 자리를 찾고 있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이고와 이의방은 임종식과 이복기를 칼로 쳐죽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한뢰는 환관들의 도움을 받아 급히 의종에게 달려갔다. 자초지종을 들은 의종은 화를 내며 환관 왕광취로 하여금 이의방과 이고를 저지토록 하였다.
이에 정중부는 한뢰를 죽이라고 명령하며 배윤재를 보내 한뢰를 내줄 것을 청원했다. 그러나 한뢰는 의종에게 매달려 나오지 않다가 이고가 칼을 뽑고 들어가서 위협하자 그제서야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이내 이고의 칼에 맞아 즉사하였다. 이를 본 문신들이 무신들을 꾸짖자 이고 등은 환관 및 주변에 있던 문신들을 살육하였다. 그리고 난 후 곧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달려가 수십 명의 궁궐 관원들을 척결하였다. 이를 목격한 의종은 정중부에게 살인행각을 중지할 것을 명령했으나 정중부는 뭉그적거리며 왕명을 받들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정권을 장악한 정중부와 이의방, 이고 등의 무신들은 환관 왕광취, 백자단 등을 죽여 저잣거리에 효수하고, 의종의 사저인 관북택, 천동택, 곽정동택의 재산을 탈취하여 나누어 가졌다.
그리고 며칠 후 정중부는 의종을 폐하여 거제도의 폐왕성(廢王城)에 연금시키고 의종의 동생 익양공을 왕으로 세웠다. 이렇듯 다소 우발적으로 근왕병들이 일으킨 무신정변은 결국 문신들을 대거 참살하고 급기야 왕을 교체하여 무신시대를 열게 되고, 고려 사회는 새로운 변혁기로 접어든다.
그 뒤 1173년에 김보당 등 의종 복위 세력이 무신 정권에 항거하여 거병하면서 사람을 보내어 유배된 의종을 모셔와 받들고 경주로 가서 웅거하였다. 그러나 무신 정권이 보낸 군대에게 모두 패하였다. 이 때 의종은 총애하던 장수 이의민에 의해 곤원사(坤元寺) 연못가에서 술을 두어 잔 마신 뒤에 등뼈가 꺾여지고 시체는 그대로 연못에 수장당하는 비참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편집] 가족 관계
- 장경왕후 김씨(莊敬王后)
- 효령태자(孝靈太子)
- 경덕궁주(敬德宮主)
- 안정궁주(安貞宮主)
- 화순옹주(和順翁主)
- 장선왕후 최씨(莊宣王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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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대 고려왕 1146년 - 117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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