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공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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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恭愍王, 1330년 - 1374년, 재위 1351년 - 1374년)은 고려의 제31대 군주이다. 초명은 기, 고친 이름은 전, 호는 이재와 익당, 시호는 공민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恭愍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 충숙왕의 차남이며, 몽골식 이름은 빠이란티무르[伯顔帖木兒]이다. 영특하고 다재다능했으며, 특히 그림과 서예는 당대 최고의 수준이었다고 한다.
[편집] 생애
1344년 (충목왕 원년)에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에 봉해졌고, 1349년 (충정왕 1년)에 원나라 황족 출신인 노국대장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충정왕의 어머니 희비 윤씨가 국정을 농단하자, 원나라 황제는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강릉부원대군은 노국대장공주와 같이 귀국하여 국왕이 되었다. 즉위 초에 전왕 충정왕을 사사하였다.
공민왕은 당시 원나라의 기황후를 등에 업고 세력을 부리던 기철등의 기씨 일파를 없애고, 신돈을 등용하여, 권문세족에게 빼앗긴 토지를 백성들에게 돌려 주었다. 또한, 반원정책을 써서, 원나라의 쌍성총관부를 없애고, 공영진(공영진의 장소에 대해서는 확실하지가 않음)을 고려의 영토로 귀속시켰다.
그러나 노국대장공주의 갑작스러운 사망, 신돈의 쿠데타 사건으로 더 이상의 개혁 정치를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자제위(子弟衛)라는 기관을 만들어 미소년들을 궁중에 출입하게 하여 날마다 그들과 변태적인 동성애를 즐기다가, 홍륜과 환관 최만생에게 1374년에 칼로 난자당해 시해당했다.
다음으로 왕이 된 우왕은 궁녀 한씨의 소생이였다. 그런데 원래 공민왕은 후사가 없었고 신돈이 실제로 아버지라는 주장이 있었다. 고려를 이은 조선왕조에서는 이러한 근거로 우왕과 창왕이 고려의 왕권을 찬탈하여서 고려 왕조의 맥이 끊긴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새로운 조선의 개국을 정당화 하였다.
[편집] 공민왕 재위 시절의 주요 사건
다음은 시간 순으로 공민왕 재위 기간 중 주요 사건이다.
- 조일신의 난 : 임진정변(壬辰政變)이라고도 한다. 1352년 9월 공민왕의 수종공신 조일신이 개경에서 일으킨 반란이다.
- 고려의 원나라 파병: 원나라의 요청으로 1354년 7월부터 1356년까지 최영, 이방실, 안우, 김용, 정세운 등과 병력 2천을 원나라에 파병한 일이다. 파병군은 고려종정군(高麗從征軍)이라 불렸다. 파병 후 귀국한 장군들이 원나라가 몰락하고 있다고 보고하여, 공민왕은 반원개혁을 추진하게 되었다.
- 병신정변(丙申政變): 1356년 4월 부원세력 기철, 권겸, 노정 등이 역모로 인하여 숙청되었던 사건. 이로써 고려 내 부원 세력은 몰락하게 되었다.
- 파사부(婆娑府: 현 단동) 공격 : 1356년 4월~6월 고려왕조가 인당, 최영 등 휘하의 고려군을 파견, 압록강 건너 원의 8참(站) 등을 공격케 하여 파사부 등 3참을 격파하였던 사건. 이 사건으로 인하여 고려왕조 최초의 요동정벌이 행해짐.
-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수복: 1356년 4월 ~ 8월 류인우(柳仁雨) 휘하 고려군이 몽골 간섭기 이래 원의 통치하에 있던 쌍성총관부를 수복한 일이다. 공민왕 반원 개혁의 상징적 사건이다. 이때 쌍성총관부의 무관이면서도 류인우에 협력하여 성 함락에 기여한 이성계와 그의 부친 이자춘이 고려 정계에 등장했다.
- 오예포 대첩(吾乂浦大捷 ): 1358년 최영 휘하의 고려군이 4백 척 규모의 함대로 오예포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친 전투
- 1차 홍건적 침입 : 1359년 12월부터 1360년 2월까지 홍건적 모거경이 4만 명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한 사건이다. 모거경은 서경까지 함락시켰다가 안우, 이방실, 최영 휘하의 고려군에게 패해 물러갔지만, 이후 고려의 반원개혁이 차질을 빚기 시작했다.
- 2차 홍건적 침입 : 1361년 11월부터 1362년 1월까지 반성, 관선생, 사류, 파두반이 이끄는 홍건적 10만 ~ 20만 명이 고려를 침입, 개경)까지 함락시켰다가 정세운의 고려군 20만 명에게 패주하였던 사건.
- 사원수(四元帥) 모살: 1362년 1월~3월 김용( 혹은 공민왕의 )의 음모로 인하여 정세운, 안우, 이방실, 김득배가 상쟁하여 모살되었던 사건.
- 나하추의 침입 : 1362년 2월부터 7월까지 요동의 몽골 대군벌 나하추가 쌍성총관부 잔당 조소생과 함께 고려의 동북면(현재 함경도 지역)을 침입하였다가 이성계의 고려군에게 패주하였던 사건. 이 사건으로 인하여 쌍성총관부의 잔당 조소생, 탁도경 세력이 완전 몰락했다.
- 흥왕사의 변(김용의 난) : 1363년 3월 김용이 덕흥군과 내응하여 흥왕사에서 공민왕을 살해하려다가 최영 등에게 진압되었던 사건.
- 덕흥군의 침입 : 1364년 1월 원과 부원세력 최유와 대립국왕 덕흥군이 원나라군 1만 명을 이끌고 고려의 서북면(현 평안남북도)을 침입하였다가 최영과 이성계의 고려군에 패한 사건이다.
- 김삼선(金三善)&김삼개(金三介)의 침입: 1364년 1월 ~ 2월에 여진의 대추장 김삼선, 김삼개 형제가 고려의 동북면을 침입하였다가 이성계에게 패주하였던 사건.
- 박백야대(朴伯也大)의 침입 : 1364년 1월 원의 동녕로 만호 박백야대가 고려의 서북면 연주(평안북도 영변)을 침입한 사건이다. 원나라 최후의 공세로서 최영에게 격파당하였던 사건이다.
- 진해대첩(鎭海大捷): 1364년 5월 김속명의 고려군이 진해에 침입했던 3천 명의 왜구를 격파하였던 사건.
- 을사환국(乙巳換局): 1365년 5월 신돈이 정계에 등장하면서 시작된 신돈의 개혁정치 시대다.
- 1차 제주도 정벌 : 1366년 10월 김유(金庾)가 1백 척 함대로, 병신정변 이후 반란을 일으켰던 제주도를 정벌했다가 패하였다. 제주도는 이후에도 10여년을 여전히 고려 왕조에 반발하며 버텼다.
- 1차 동녕부(東寧府) 정벌 : 1370년 1월 ~ 2월
- 2차 동녕부 공격 : 1370년 11월
- 신해환국(辛亥換局 ): 1371년 7월 신돈이 유배된 후 처형된 사건이다. 공민왕의 개혁이 사실상 끝나게 되는 시점이다.
- 3차 동녕부 공격: 1371년 9월~ 10월
- 2차 제주도 정벌: 1374년 7월 ~ 8월 최영이 314척의 함대와 병력 25,600여명 이끌고 제주도를 완전히 수복한 사건이다. (목호의 난)
- 공민왕 시해 사건 : 1374년 9월 공민왕이 홍륜(洪倫), 최만생(崔萬生) 등 자제위(子弟衛)에게(혹은 권문세족에 의해) 시해된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우왕이 즉위하면서 권문세족의 친원 보수 반동정치가 전개됨.
[편집] 영향
공민왕의 개혁은 당대에는 성공하지 못하는 듯 했으나 개혁안 중 상당수가 조선 건국 세력에게 계승되어 조선 건국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전 임 충정왕 |
제31대 고려왕 1351년 - 137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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