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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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顯宗, 991년 - 1031년)은 고려의 제8대 왕(재위: 1009년 - 1031년)이다. 휘는 순(詢), 자는 안세(安世), 시호는 현종대효덕위달사원문대왕(顯宗大孝德威達思元文大王). 안종(安宗)과 효숙왕후(孝肅王后) 황보씨(皇甫氏)의 아들이다.
목차 |
[편집] 생애
[편집] 즉위 이전
동성애자였던 목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고려 왕실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은 왕순밖에 없었다. 왕순은 태조의 8번째 아들인 왕욱의 아들이었으니 태조의 손자인 셈이다. 하지만 안종 왕순의 어머니인 헌정왕후는 경종의 아내였다.
본래 헌정왕후는 안종 왕욱과 이복 형제 사이인 대종 왕욱의 딸이었다. 안종 왕욱은 헌정왕후의 삼촌이었다. 당시 고려 왕실에서는 친족끼리 결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삼촌과 조카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난 것은 문제 되지 않았다. 하지만 경종의 아내였던 헌정왕후와 안종 왕욱의 사랑은 허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헌정왕후는 궁궐을 떠나 자기 집에 머물렀는데, 그녀의 집이 왕욱의 집과 가까이 있어서 두 사람은 자주 오가며 만났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금지된 사랑에 빠졌고 둘 사이에서 왕순이 태어났다.
헌정왕후가 삼촌인 왕욱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은 한동안 비밀로 부쳐지다가 한동안 비밀로 부쳐지다가 얼마 뒤 성종이 이를 알게 되었다. 성종은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책임을 물어 왕욱을 귀양 보냈다. 왕욱이 귀양지로 떠나던 992년 7월, 헌정왕후는 아이를 낳다가 숨을 거두었다.
성종은 왕순을 불쌍하게 여겨 궁중에서 유모를 두어 기르도록 했다. 유모는 왕순에게 항상 ‘아버지’라는 단어를 가르쳤다.
그러던 어느 날 성종이 왕순을 보러 왔을 때, 왕순이 성종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무릎 위로 기어올랐다. 사실 성종은 헌정왕후와 남매 사이라 왕순에게는 외삼촌인 셈이었다. 자신에게 아버지라고 부르며 안기는 아이를 보고 성종은 눈물을 흘리면서 왕순을 아버지 왕욱에게 데려다 주라고 명령했다.
이렇게 해서 왕순은 2살 때 처음으로 친아버지 품에 안겼다. 하지만 왕순이 5살이 되던 996년에 왕욱은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고아가 된 왕순은 이듬해 다시 개경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해에 성종이 승하하고 목종이 즉위하면서 왕순은 목숨이 위태로운 처지가 되었다.
자식을 낳지 못한 목종은 1003년에 왕순을 대량원군(大良院君)에 봉해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목종의 모후 천추태후는 자신과 김치양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왕순을 강제로 승려로 만들어 출가시켜 버렸다. 이뿐만 아니라 자객을 보내 왕순을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신혈사(神穴寺)의 늙은 승려가 꾀를 내어 방 안에 굴을 파고 그 위에 침대를 놓아 왕순을 숨겨 주었다. 그래서 왕순은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목종이 병에 걸리자 천추태후는 더욱 적극적으로 왕순을 죽이려 했다. 자객을 보내는 것은 물론 독이 든 음식을 먹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죽음의 공포에 떨며 지내던 왕순은 몇 번이나 목종에게 자신을 살려달라고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왕순이 임금이 되는 것을 꺼린 유행간이 중간에서 가로채 목종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다행히 목종의 측근인 유충정이 그 편지를 목종에게 전해주게 되었고, 덕분에 왕순은 간신히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
목종은 자신이 죽을 때가 가까워졌다고 느끼고는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왕순을 은밀히 궁궐로 데려오게 했다. 그리고 서경 도순검사인 강조를 불러들였다.
하지만 강조는 천추태후가 왕명이라 꾸미고 자신을 죽이려는 것으로 착각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강조의 군대는 곧 궁궐을 손에 넣고 천추태후와 김치양 일파를 없애버렸다. 그리고 1009년 2월 목종을 폐위시키고 왕순을 임금으로 옹립했다. 이때 그의 나이 18살이었다.
[편집] 재위 기간
헌종은 왕위에 오르자 곧 교방을 혁파하고 목종 때에 늘어난 궁녀 100명을 해방하였다. 그리고 유운부를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삼고, 강조를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로 임명하여 조정을 일신하였으며, 연등회를 부활시켜 백성들의 화합을 도모하고 동북 변방으로 이주시켰던 남도 출신 양민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등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일련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헌종은 즉위 초부터 전쟁에 휘말려 고초를 겪어야 했다. 요나라에서 목종의 폐위를 구실삼아 고려를 침략했기 때문이다.
여진족의 고발로 목종 폐립의 내막을 알게 된 요나라는 1010년 7월 목종 폐위 사건의 진상을 밝힐 것을 요구했다. 고려는 이에 진적과 윤여를 파견하여 폭종 폐위 사건의 양해를 구하였으나 요나라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요나라와 고려 양국간에 전쟁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삼아 30만 명의 군사를 주어 통주(평북 선천)에 진을 쳐 요나라군을 방어하게 했지만 강조의 죽음과 함께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통주에서 강조가 이끌던 정예부대를 대파한 요나라군은 여세를 몰아 남쪽으로 향했다. 요나라 성종이 서경을 돌파하고 개경을 향해 돌격해오자 신하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현종에게 항복을 건의하였는데 예부시랑(禮部侍郞) 강감찬만이 홀로 반대하고 나섰다. 강간찬의 건의에 따라 현종은 일단 광주로 피신했다. 그러나 요나라군이 개경을 함락시킨 후에도 계속 추적해 오자 현종은 공주를 거쳐 노령산맥을 넘어 나주로 피신했다. 이 과정에서 현종은 몇 번의 죽을 위기를 겪는데 그 때마다 중랑장(中郞將) 지채문의 호위로 무사할 수 있었다.
요나라군은 고려군과의 전면전으로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어 더이상 고려에 머물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입성 7일 만에 개경에서 물러나, 서둘러 다시 북쪽으로 퇴각하였다.
요나라군이 퇴각하자 현종은 다시 개경으로 돌아왔다. 개경에 도착한 현종은 백관을 다시 세우고, 전란중에 공을 세운 자를 포상하는 등 전후 수습책을 마련하였다.
그러는 와중에 여진족이 침입하여 고려는 또 한 번 전운에 휩싸였다. 동여진의 군대가 전함 100척을 이끌고 경주를 습격한 것이다. 하지만 전란에 익숙해 있던 고려군의 방어로 여진은 곧 퇴각하였으며, 고려는 여진족을 압박하여 침략의 책임을 추궁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012년 5월에도 동여진 군대가 경상도 일대를 침략하였지만 문연, 강민첨 등이 이끄는 고려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처럼 요나라, 동여진 등의 주변국과의 잇따른 전쟁을 치루면서 고려는 전쟁에 따른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서 요나라와 화해를 모색하였다. 하지만 요나라의 황제는 고려의 왕이 직접 찾아와 입조할 것을 요구하였고, 고려가 이를 수용하지 않자 몇 번에 걸쳐 끈질기게 고려 침략을 감행해 강동의 6개 성을 탈취하려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1018년 12월 소배압이 이끄는 요나라군 10만 명이 다시 침략을 감행했다.
요나라의 대군이 밀려올 것을 예상한 고려는 20만 병력을 조성하여 평장사(平章事) 강감찬을 상원수(上元帥)로, 대장군(大將軍) 강민첨을 부원수(副元帥)로 임명하여 요나라군을 대적체 하였다. 1019년 2월 초하룻날 벌어진 대접전에서 고려군에 의해 요나라군이 구주에서 거의 몰살당하였다. 이 전투가 구주대첩이다.
2번의 큰 전란을 겪은 현종은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개경 외곽에 성곽을 축조하고 요나라군에 의해 훼손된 강동 6성과 각 지방의 성곽을 정비하여 국방에 만전을 기하였다. 또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과거제도를 활성화하여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인재를 우대하고 학자들을 양성하여 국가의 재목들을 길렀다.
한편 요나라의 황제는 전쟁에서 대패한 소배압을 징계하고, 1019년 5월에 동경 문적원소감 오장공을 보내 고려에 화친을 제의해 왔다. 또한 동여진 추장 나사불도 같은 해 6월에 부하들을 이끌고 입조하여 화의를 약속하였으며, 서여진의 추장 아라불도 7월에 부하들을 거느리고 와서 말을 바치며 화의를 다짐했다. 그리고 그 해 9월에 고려는 탐라, 흑수, 말갈 등의 소수 민족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어 위용을 과시하며 변방의 안정을 꾀했다.
이처럼 고려는 요나라의 10만 대군을 격파한 후 국내외적으로 위상이 한껏 높아졌으며, 그에 따라 사회도 빠른 속도로 안정을 되찾아갔다.
사회가 안정되자 현종은 전란중에 소실된 문화재와 서적들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전란중에 소실된 사초를 복원하기 위해 황주량으로 하여금 태조에서 목종에 이르는 7명의 왕들의 실록을 편찬하게 하는 한편, 황룡사를 비롯한 사찰들을 중수하게 하고, 6천여 권의 대장경을 편찬토록 하였다.
이 같은 현종 때의 국력 강화에 힘입어 고려는 13세기까지 중국대륙과 평화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며 안정을 지속할 수 있었다.
비록 많은 수난을 당하였지만 오히려 그것을 이용해 국력을 신장시키고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고려의 위상을 대외에 널리 과시한 현종은 어린 시절부터 너무 많은 고초를 겪은 탓인지 1031년 5월 재위 22년 만에 40살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능호는 선릉(宣陵)이다.
[편집] 가족 관계
- 원정왕후 김씨(元貞王后)
- 원화왕후 최씨(元和王后)
- 효정공주(孝靜公主)
- 천수전주(天壽殿主)
- 원성왕후 김씨(元成王后)
- 원혜왕후 김씨(元惠王后)
- 낙랑군(樂浪君) : 문종
- 평양공(平壤公)
- 효사왕후(孝思王后)
- 원용왕후 유씨(元容王后)
- 원목왕후 서씨(元穆王后)
- 원평왕후 김씨(元平王后)
- 효경공주(孝敬公主)
- 원순숙비 김씨(元順淑妃)
- 경성왕후(敬成王后)
- 원질귀비 왕씨(元質貴妃)
- 귀비 유씨(貴妃)
- 궁인 한씨(宮人)
- 검교태사(檢校太師)
- 궁인 이씨(宮人)
- 궁인 박씨(宮人)
전 임 목종 |
제8대 고려왕 1009년 - 1031년 |
후 임 덕종 |
고려의 역대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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