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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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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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 위 | |
1400년 ~ 1418년 | |
왕 비 | 원경왕후 |
황 후 | {{{황후}}} |
왕 후 | {{{왕후}}} |
부 군 | {{{부군}}} |
앞선 왕 | 정종 |
앞선 황제 | {{{이전 황제}}} |
다음 왕 | 세종 |
다음 황제 | {{{다음 황제}}} |
조선의 제3대 국왕 |
태종(太宗, 1367년 - 1422년, 재위 1400년 - 1418년)은 조선의 제3대 임금이다. 휘는 방원(芳遠), 자는 유덕(遺德), 시호는 태종공정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太宗恭定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文武叡哲成烈光孝大王). 태조와 신의왕후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편집] 생애
1367년 함흥 귀주동의 사저에서 태어났으며, 1382년 문과에 급제하고 1388년에 정조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이후, 아버지를 도와 고려 왕조 유지 세력을 제거하였다. 특히 정몽주를 제거함으로써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 세력의 기간을 굳건하게 하여 새로운 왕조인 조선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92년 이성계가 태조로 등극함에 따라 정안대군에 봉해졌다.
1400년 11월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자들 간의 왕위 다툼인 제1차 왕자의 난과 제2차 왕자의 난을 주도적으로 평정하여 정치적 실권을 잡게 되었으며, 1400년에 형인 정종으로부터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왕세제로 책봉된 지 9개월 만에 정종의 양위를 받아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이후 태종은 17년 10개월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관제 개혁, 신문고 설치, 호패법 실시, 조세제도 정비, 국방 강화 등 조선 왕조의 기반을 닦는데 많은 치적을 남겼다.
태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다시 서울로 수도를 옮기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옮기지 못하고 있다가 1404년, 경복궁이 완공되자 서울로 수도를 옮김으로써 서울은 이후 500년 동안 조선의 문화와 정치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태종은 조선 초기의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관제 개혁을 통한 왕권 강화에 온 힘을 쏟았다. 중앙 제도와 지방 제도를 정비하여 아직 남아있던 고려의 잔재를 완전히 없애고 군사 제도를 정비하여 국방력을 강화하였으며 토지 제도와 조세 제도의 정비를 통하여 국가의 재정을 안정시켜 나갔다.
1405년 의정부 기능을 축소시키고 육조의 기능을 강화시켜 임금의 직속 기관으로 두려 했던 육조직계제는 태종 14년인 1414년이 되어서야 실행될 수 있었다. 그 전까지는 ‘임금=의정부-육조’ 체제로 임금의 권한이 분산되어 있던 국정을 ‘임금-육조’로 전환함으로써 태종의 의도대로 왕권이 크게 강화되고 나라는 안정을 찾게 되었다.
또 과거 제도를 실시하여 계급이 아닌 능력과 실력 위주로 관리들을 등용하였으며, ‘숭유억불(崇儒抑佛)’이라는 개국 이념에 따라 사찰에 속해 있는 토지와 노비를 모두 몰수하는 등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널리 장려했다. 그 외에도 호패법을 실시하여 양반에서 노비에 이르기까지 백성들 모두가 신분증인 호패를 항상 지니고 다니게 함으로써 인적 자원을 정확하게 파악하였다. 당시 북쪽 국경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여진족을 다독거려 변방의 안정에도 신경을 기울였다.
태종은 1401년 8월에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직접 풀어주기 위해 신문고를 설치하였다. 신문고는 백성들이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지만 절차를 거쳐도 해결하지 못하는 일을 임금에게 직접 알릴 수 있도록 궁궐에 달아 놓은 북이었다. 신문고는 임금이 중심이 되어 정치함으로써 국가의 안정을 찾으려 했던 태종의 생각을 담고 시행되었다.
이와 같이 국가 전반에 걸친 태종의 대대적인 개혁 노력이 바탕이 되어 다음 임금인 세종 때에는 조선이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군사적 발전을 이루게 된다.
태종은 임금으로 재위하고 있던 18년 동안 4번이나 왕위를 맏아들이자 왕세자인 양녕대군에게 물려주겠다고 말했다. 양녕대군이 외가에서 자랐던 만큼 외숙부들과 절친한 사이였는데, 아내인 원경왕후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태종은 양녕대군과 가까이 지내는 원경왕후의 동생 민씨 형제들마저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던 중 태종이 양녕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겠다고 발표하자 민무구 형제는 양녕대군을 찾아가 평소 태종에게 품고 있던 불만을 이야기했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태종은 민무구 형제를 유배시켜 사약을 내렸다. 또한 민무구 형제가 죽자 태종은 형제의 억울함을 호소한 민무휼과 민무회 형제에게도 사약을 내렸다.
태종은 양녕대군이 하루종일 방탕한 생활만 일삼는다는 이유를 들어 왕세자에서 폐위하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아 1418년에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상왕이 된 후에도 4년 간 줄곧 국정을 감독하여 세종의 왕권 안정을 위해 노력하다가 1422년 5월 10일 창경궁에서 승하하였다. 능은 헌릉(獻陵)이다.
[편집] 가족 관계
-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 효빈 김씨(孝嬪)
- 경녕군(敬寧君)
- 명빈 김씨(明嬪)
- 숙안옹주(淑安翁主)
- 신빈 신씨(信嬪)
- 함녕군(咸寧君)
- 온녕군(溫寧君)
- 근녕군(謹寧君)
- 정신옹주(貞愼翁主)
- 정정옹주(貞靜翁主)
- 숙정옹주(淑貞翁主)
- 소신옹주(昭信翁主)
- 숙녕옹주(淑寧翁主)
- 숙경옹주(淑敬翁主)
- 숙근옹주(淑謹翁主)
- 선빈 안씨(善嬪)
- 익녕군(益寧君)
- 소숙옹주(昭淑翁主)
- 경신옹주(敬愼翁主)
- 의빈 권씨(懿嬪)
- 정혜옹주(貞惠翁主)
- 소빈 노씨(昭嬪)
- 숙혜옹주(淑惠翁主)
- 숙의 최씨(淑儀)
- 희령군(熙寧君)
- 덕순옹주 이씨
- 후령군(厚寧君)
- 숙순옹주(淑順翁主)
- 후궁 고씨(後宮)
- 혜령군(惠寧君)
[편집] 같이 보기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대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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