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요한 바오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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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 바오로 2세(라틴어: Ioannes Paulus PP. II, 이탈리아어: Papa Giovanni Paolo II)는 제264대 교황(재위: 1920년 5월 18일 ~ 2005년 4월 2일)으로 27년 간 로마 가톨릭을 이끌었다. 본명은 카롤 유제프 보이티와(폴란드어: Karol Józef Wojtyła 듣기 )이다. BBC는 그를 두고 “중세 시대를 제외하면 요한 바오로 2세만큼 당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 교황은 없다”고 평가했다.
목차 |
[편집] 생애
[편집] 즉위 이전
1920년 5월 18일 폴란드 남부의 바도비체라는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예비역 육군 장교였고, 어머니 에밀리아 카초로프스카는 리투아니아 출신의 초등학교 교사였다. 1929년 어머니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1932년 의사였던 형 에드문드가 성홍열 환자를 치료하다가 자신도 감염되어 세상을 떠났다. 1941년 독일의 나치 점령하에서 아버지도 급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천부적 재능을 지닌 만능인이었다. 거의 모든 과목에서 A 학점을 받을 만큼 큰 두각을 나타냈으며 시작(詩作)활동과 연극활동에도 열중하였다. ‘롤렉(Lolek)’이라는 애칭으로 불린 그는 대학교 입시 직전에는 유명한 폴란드 여배우가 주최한 스피치 페스티벌에서 시 낭송으로 2위에 입상한 적도 있었으며, 학교 연극반에서는 주연 배우나 공동 제작자로 활약하였다. 8개 국어에 능통하기도 하다.
그의 이러한 문학과 연극 활동은 대학생 시절에도 계속되어 시를 쓰고 문학의 밤을 개최하였으며, 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도 늘 관람하고, 연극 단체를 만들어 주연 배우 노릇을 하였다. 그는 전쟁 중에도 크라쿠프에서 비밀 지하 연극 단체를 조직하고 비밀리에 연극 공연을 가졌다. 게슈타포에서 가택 수색을 피해가며 약 30분짜리 연극을 아파트 같은 곳에서 30명 정도의 엄선된 관객들에게 공연한 것이다. 이것은 매우 큰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다. 또한 친구들과 함께 끊임없이 문학 토론회를 개최하였으며 때로는 각본을 써보기도 했다.
그는 또 스포츠를 무척 좋아하여 축구의 뛰어난 골키퍼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수영도 하고 고향인 바도비체 근처 언덕에서 스키를 즐기었다. 그는 스케이팅도 좋아하였고 등산과 카누도 자주 하였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인간이 이념과 민족, 국가의 이름으로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몸소 깨달은 그는 당장 학업을 중단하고 1946년에 가톨릭 사제로 서품을 받았으며 이듬해에 로마로 유학을 떠났다. 귀국 후 대학교에서 윤리학을 가르치다 1958년 폴란드 크라쿠프 교구의 보좌주교로 임명되었다. 1963년 크라쿠프 교구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1967년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소비에트 연방에 의해 공산화된 조국 폴란드를 떠나지 않고 공산주의 정권의 교회박해에 용감하게 맞섰다.
[편집] 재위 기간
교황 요한 바오로 1세가 즉위한 지 34일을 넘기지 못하고 선종하자 다시 콘클라베가 개최되었다. 1978년 10월 22일 8번째 투표에서 이탈리아인이 아닌 사람으로서는 455년만에 처음으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선출된 이유는 추기경들 사이에서 그가 교회의 위기를 극복할 대안이란 인식이 점차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 공산주의 국가였던 폴란드인이자 슬라브계 사람으로써는 최초로 선출된 교황이기도 하였다. 그는 선임자가 택한 이중의 이름을 그대로 취함으로써 교황 요한 23세와 교황 바오로 6세의 의지를 이어받고 싶어한 교황 요한 바오로 1세의 뜻을 이어가겠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틀 후 시스티나 성당에서 추기경들을 접견하면서 자신의 정치노선을 암시했다. 그는 공산주의, 비(非)윤리적 자본주의와 정치적 억압에 대해 단호하게 맞서기로 결정하였다. 특히 강대국들의 전횡과 전체주의의 압제에는 쉬지 않고, 거세게 저항하기로 했다.
폴란드 국민들은 자국 출신의 교황이 생겨나자 열렬히 환영한 반면 정부를 비롯한 공산주의권 국가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폴란드 정부는 새로운 교황이 누구이며 국제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추궁하는 소비에트 연방의 집요한 질타에 당황하였다. 당시 KGB에서는 로마 교황청이 폴란드 출신의 교황을 내세워 폴란드 내에 불안을 야기시킴으로써 최종적으로는 동구권 전체의 공산주의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계획을 획책했다고 단정하기도 했다.
1979년 3월 요한 바오로 2세는 폴란드 연합노동당과 담판하려는 의도에서 폴란드를 방문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폴란드 정부는 교황에 대한 국민들의 열광에 비추어보았을 때 교황의 방문을 무사시킬 경우 시위나 폭동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는 예상에 끝내 승인하고 말았다.
1981년 1월 15일 요한 바오로 2세는 바티칸에서 바웬사와 자유노조 지도부를 개인적으로 접견했다. 교황은 노조의 목표를 지지할 것을 명확히 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모범이 될 것이라고 칭찬하기까지 했다. 20세기에 들어와 처음으로 이탈리아가 아닌 나라의 정치에 교황이 수년 동안 결정적인 작용을 한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 자신이 폴란드 출신이라는 점도 상당히 어필했다.
1981년에는 사건이 잇달았다. 1월 31일 폴란드 자유노조는 독자적인 주간신문을 창간하여 독자적인 발언권을 얻었다. 11일 후에 국방장관이었던 보이치에크 야루젤스키가 행정수반이 되었다. 폴란드 국내 정세는 끊임없는 파업으로 더욱 심각해졌다. 3월에는 바르샤바 동맹 여러 국가에서 온 부대들이 폴란드에서 공동 작전을 펼쳤지만 자유노조 역시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며 연대파업으로 위협을 가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런 식으로 힘을 과시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인식하고 스테판 비스친스키 추기경에게 보내는 교서에서 연대파업 중단을 간접적으로 요청했다. 그에 따라 야루젤스키는 노동자들과 3개월 동안 파업 중단에 관해 협상했다. 국가를 파산 위기에서 구하자는 의도였다.
상대적으로 안정된 이 국면에 바티칸과 폴란드는 큰 타격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1981년 5월 13일 터키 출신인 메흐메드 알리 아그자(Mehmet Ali Ağca)가 성 베드로 광장에서 일반 알현 중인 요한 바오로 2세를 저격해 중태에 빠뜨린 것이다. 기적적으로 대동맥과 척추를 다치지 않은 요한 바오로 2세는 여러 번의 수술 끝에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후에 그는 암살 미수범인 아그자를 용서하여 그에 대한 사면을 요청했고, 아그자는 2000년에 석방되었다. 이 교황 암살 미수 사건의 배후에는 소비에트 연방의 KGB가 있었다는 것이 2005년 3월에 빛을 본 문건에 의해 밝혀졌다. 당시 KGB는 요한 바오로 2세가 폴란드의 자유노조 운동을 지지함에 따라 동유럽에서 활발하던 민주주의 혁명 열풍에 그대로 영향을 줄 것으로 단정, 교황 암살 음모를 실행에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동구권의 붕괴와 소비에트 연방의 와해로 인한 냉전 해체 이후에는 유일하게 남은 지구상의 유일한 패권국이 된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국가사회주의와 자유로운 시장경제의 대립 대신에 자본주의와 자유주의가 새로운 위기로 부각되고 있었다. 미국의 일방적 횡포이자 노동자와 농민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신자유주의와 군사 침략(이라크 전쟁)에 대해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번에도 극도로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는 18세기 이후 러시아와 독일, 양대 강국에 의해 나라가 송두리째 없어졌고 20세기엔 나치와 공산주의라는 전체주의 사상에 억압 받은 폴란드의 국민으로 태어난 것이 아마 그의 이런 성격을 만들었을 것이다.
종교와 윤리 문제에 있어서는 보수적인 정책을 견지하였다.
또 종교 간의 증오를 풀기 위해 다른 기독교 종파들은 물론 다른 종교와도 화해를 하고 결연을 맺는 데에 많은 열정을 쏟기도 하였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서로 대립하던 타 교파 및 다른 종교들과 상징적인 화해를 한 셈이다. 이러한 요한 바오로 2세의 행적은 타 교파 및 다른 종교의 존엄성을 인정한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1986년 로마에 있는 유대교 회당을 방문하여 폴란드 문학에서 유래한 '오래된 형제'라는 단어로 유대인을 묘사했다. 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한 현장인 홀로코스트 기념관과 유대교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에서 기도를 하기도 하였다. 2천년 동안 유대인에 가한 기독교의 범죄를 용서해 달라는 청은 당시 이스라엘과의 관계 개선에 진전을 이루었고 7년 후에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데 받침돌이 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유대인에 대한 사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이후 칼 라너 등의 신학자들에 의해 유대인 학살을 가톨릭교회가 묵인한 잘못을 반성해야 한다는 예언자적인 목소리가 있어왔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또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의 동서방 교회 대분열의 치유가 그의 오랜 숙원이라 밝히고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루마니아, 그리스, 우크라이나 등 동방 정교회 지역을 냉대를 무릅쓰고 방문하기도 하였다. 이는 타 교파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화해노력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슬람 국가에 교황으로서는 최초로 방문하였으며, 1999년에는 모하마드 하타미 이란 대통령을 만났고, 힌두교의 나라 인도를 방문했다.
1994년 '3,000년을 맞는 칙서'를 통해 역대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교황청이 과거에 하느님의 이름으로 저질렀던 수많은 불관용들과 불의에 대한 침묵(십자군 원정, 종교재판, 타 교파에 대한 배타적이었던 모습 등)을 인정하고 인류 앞에 사죄하여, 교회의 어두운 과거사 반성이란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그의 '3천년을 맞는 칙서'는 이전 교황시대의 잘못만을 인정했을 뿐, 자신이 교황으로 사목하던 시기의 잘못에 대한 반성이 없다는 비평도 있다. 말하자면 유대인 학살 묵인, 개신교와 동방정교회등의 타 교파에 대한 배타성, 인디오 말살등에 대해 인정하고 반성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교황으로 사목하던 시기의 잘못인 진보적 신학자들에 대해 학자로서의 권리 박탈로 탄압한 잘못에 대한 사죄는 없었다는 점에 대한 비평이다.
1982년에는 포클랜드 전쟁을 벌이던 영국과 아르헨티나를 찾아가 종전을 설득했고, 1999년 유고슬라비아 전쟁 때에도 특사를 파견하여 "폭력은 결국 또 다른 폭력을 낳을 뿐"이라며 평화를 호소했다. 2001년 9·11테러 직후에는 전세계 로마 가톨릭 신자들과 함께 분쟁 종식을 위한 단식 기도를 했다.
1984년 5월 3일 역대 교황 중 처음으로 한국의 천주교 전래 200주년 기념식을 맞아 방문했으며 한국의 순교자 103명을 성인으로 시성하였다. 그는 방문 당시 한국의 역사책 번역본을 읽고 "혹독한 시련에도 민족의 정통성을 꿋꿋이 지켜온 한국의 역사가 모국 폴란드와 닮았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요한 바오로 2세는 40여만 명이 모인 부산 강연에서 개발독재로 억눌린 삶을 살아온 노동자에게 정당한 임금을 줄 것을 요구하는 등 당시 정치 상황에서 볼 때 민감한 발언을 했다. 또 그는 방한 마지막 행사로 서울 장충 체육관에서 열린 젊은이들과의 대화 시간에 '군사 정권의 폭압성을 알리겠다'며 젊은이들이 들고 온 최루탄 상자를 흔쾌히 받기도 하였다.
그 뒤 요한 바오로 2세는 1989년 10월 5일 ~ 10월 8일에 서울에서 열린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를 맞아 대한민국에 두 번째로 방문하였다. 그는 65만여 명이 운집한 여의도 광장에서 대한민국과 북조선의 화해를 바라는 평화의 메시지를 낭독하기도 하였다. 그 후에도 대한민국에 큰 사건이나 재해가 있을 때마다 메시지를 보내왔다. 2000년 남북 정상 회담 때에는 축하 메시지를 보내왔고, 2002년 태풍 루사와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사고 및 태풍 매미로 인한 피해 때는 위로 메시지를 전해왔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북조선 방문도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00년 3월 로마를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이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하여 북조선 방문을 권유하자 요한 바오로 2세도 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후 교황청은 평양에 대주교를 파견하고 북조선에 수십만 달러를 지원하는 등 화해 분위기 조성에 나섰다. 하지만 교황청이 북조선 방문 전제조건으로 요구한 북조선의 로마 가톨릭 인정, 가톨릭 신부 입북 허용에 대해 북조선 측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교황의 북조선 방문은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편집] 말년
한편 탁월한 학식과 예술적인 재능을 겸비했을 뿐더러 운동 실력까지 뛰어난 데다가, 재임기간 동안 129개국을 돌아다니는 등 대내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많이 하여 '신의 운동선수'로까지 불렸었던 그였지만 1996부터 파킨슨 병을 비롯한 여러 합병증으로 왼손을 떨며 왼쪽 얼굴 근육이 경직되는 증상 외에도 만성적인 무릎 관절염을 앓으며 급격히 허약해지기 시작하여 보행기구의 도움 없이는 걸을 수도 없게 되었다. 또 오른쪽 어깨뼈와 대퇴골이 골절되었으며 결장, 담석제거수술, 악성결장종양, 맹장염 수술과 수차례의 독감 치료를 받는 등 고령과 함께 건강 악화가 찾아왔다. 치세 말년에는 요로 감염에 따른 패혈성 쇼크로 심장과 신장 기능이 약화가 겹쳐져 병세가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가다가 2005년 4월 2일 9시 37분에 바티칸 궁전에서 선종하였다.
그의 장례 미사가 거행된 성 베드로 광장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업적을 칭송하면서 즉시 성인으로 추대할 것(Santo Subito)을 요구하였다. 이같은 여론에 따라 신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죽은 뒤 5년 안에 개시할 수 없게 되어 있는 성인 추대 절차를 이례적으로 앞당겨 요한 바오로 2세의 성인 추대를 위한 자료 수집을 공고하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편집] 문장
삼층관 밑에 있는 파란 방패를 바탕으로 왼쪽 방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황금 십자가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성모 마리아(Maria)의 첫 글자인 문자 M이 있다.
교황이 되기 전에는 'Totus Tuus'(온전히 당신의 것)를 사목 표어로 삼았었다.
[편집] 주요 저서
- 《사랑과 책임》
- 《쇄신의 기초》
- 《막스 쉘러의 학설에 입각한 가톨릭 윤리 기초의 가능성》
- 《모순의 징후》
- 《은총과 신비》
- 《우리는 그 분 안에서 하나입니다》
- 《우리는 아무도 혼자가 아닙니다》
- 《추억과 정체성: 밀레니엄 사이의 대화》
- 《여러분, 어디로 가십니까》
- 《사랑은 하늘이 준 선물》
- 《희망의 문턱을 넘어서》
- 《내 안에 그대 안식처 있으니》
- 《일어나 갑시다》
- 《2000년을 경축하라》
[편집] 회칙
- 《인간의 구원자》 (Redemptor hominis), 1979.03.04
- 《자비로우신 하느님》 (Dives in misericordia), 1980.11.30
- 《노동하는 인간》 (Laborem exercens), 1981.09.14
- 《슬라브인의 사도들》 (Slavorum apostoli), 1985.06.02
- 《생명을 주시는 주님》 (Dominum et vivificantem), 1986.05.18
- 《구세주의 어머니》 (Redemptoris mater), 1987.03.25
- 《사회적 관심》 (Sollicitudo rei socialis), 1987.12.30
- 《교회의 선교 사명》 (Redemptoris missio), 1990.12.07
- 《100주년》 (Centesimus annus), 1991.05.01
- 《진리의 광채》 (Veritatis Splendor), 1993.08.06
- 《생명의 복음》 (Evangelium Vitae), 1995.03.25
- 《하나 되게 하소서》 (Ut Unum Sint), 1995.05.25
- 《신앙과 이성》 (Fides et Ratio), 1998.09.14
-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Ecclesia de Eucharistia), 2003.04.07
[편집] 참고 문헌
- 《요한 바오로 2세》, 어린이중앙, 2005.
-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그는 누구인가?-
- CNN - Biography - Pope John Paul II
- Pope John Paul the most revered human being on earth popejohnpaul.com
전 임 요한 바오로 1세 |
제264대 교황 1978년 10월 16일 ~ 2005년 4월 2일 |
후 임 베네딕토 16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