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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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 (Viking)은 대략 800년에서 1050년 사이 활약한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해양 상인들을 일컫는다. 스칸디나비아 제어에서는 비킹이라 발음한다. 유럽과 북아메리카 북동쪽 해안 각지에 정착·약탈·무역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일반에는 해적 또는 전사로 주로 알려져 있지만 평화적인 정착과 무역 활동도 하였다. 흔히 바이킹들이 활약하던 바이킹 시대의 스칸디나비아인들을 통틀어 "바이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넓은 의미에서 학술적으로 써야 할 정확한 용어는 노르드인(Norsemen)이다.
바이킹 시대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철기시대 후기를 이르는 명칭으로 사용된다.
동슬라브족 지역(현재의 러시아·우크라이나 등)과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바이킹들을 바랑기아인(Varangians)으로 불렀다. 이 명칭은 고대 노르드어의 "베링야르(Væringjar)"의 라틴어식 표현이다. 비잔티움 황제의 노르드인 근위병들을 바랑기아 근위대라고 불렀다. 또 지역에 따라 데인족(Danes), 노르만족(Normans), 게르마니아족(Germanians)이라고도 한다. 오늘날의 바이킹들의 후예는 아이슬란드인, 노르웨이인, 덴마크인, 스웨덴인, 페로인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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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어원
"바이킹"의 어원은 확실치 않다. "작은 만"·"후미"를 뜻하는 고대 노르드어의 "vík"에 접미사 "-ing"이 붙은 데서 유래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작은 만의 거주자", 특히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의 카테가트 만 쪽 비켄(Viken) 지역의 거주자라는 뜻이다. "비킹르(vikingr)"라는 단어는 스칸디나비아에 남겨진 룬 문자로 새겨진 금석문에 많이 발견된다. 하지만 이 단어가 처음 나타나는 곳은 6세기 또는 7세기의 고대 영어(앵글로색슨어) 시 "위드시스(Widsith)"이다. 때문에 또 하나의 설은 고대 영어의 "wíc" 즉 "무역도시"("마을"을 뜻하는 라틴어의 "vic"에서 유래)에서 왔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떠나다"라는 뜻의 "avviker"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고향을 떠나 바다로 나간 이들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스웨덴의 작가 얀 기유(Jan Guillou)에 의하면 바이킹이라는 말을 긍정적 의미로 주로 사용하게 된 것은 에리크 구스타프 예이예르(Erik Gustaf Geijer)가〈바이킹(The Viking)〉이라는 시를 쓰면서부터였다. 오늘날 바이킹을 용감하고 호전적인 해양 전사로 생각하는 것은 당시의 정치적 이유와 관련이 깊다. 즉 1809년 스웨덴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600년간 스웨덴 영토였던 핀란드를 잃자 이를 회복할 자신감을 북돋기 위해 용감하고 영화로운 과거 역사를 창조할 필요가 있던 것이다. 예이예르가 회원으로 있던 예타회(Geatish Society)라는 단체는 용맹스런 바이킹 역사 창조에 큰 역할을 했다. 역시 예타회 회원이었던 작가 에사이아스 텡네르(Esaias Tegnér)는 사가문학 작품〈프리티오프 사가(Frithiofs Saga)〉를 근대적으로 개작해 북유럽과 영국, 독일에서 큰 인기를 얻어 바이킹에 대한 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편집] 역사 기록
바이킹의 무역 활동이 활발했다는 것은 헤데뷔(Hedeby)와 같은 큰 무역 도시를 보면 알 수 있다. 헤데뷔는 프랑크 왕국과의 국경지대에 위치하여 1050년경 노르웨이인들 사이의 내분으로 파괴될때까지 문화의 십자로 역할을 했다.
최초의 바이킹 약탈에 대한 기록은 앵글로색슨 전기에 나오는데 789년 포틀랜드(Portland)가 습격당했다는 기록이다. 좀더 확실한 기록은 793년 잉글랜드 동쪽 해안의 린디스판(Lindisfarne)에 있는 수도원이 약탈당했다는 기록이다(보통 이를 최초의 바이킹 약탈 기록으로 거론한다). 그후 200년간 유럽사는 바이킹과 그들의 약탈에 대한 기록으로 점철되었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해안이 바이킹의 영향권에 들어갔으며 잉글랜드 영토의 태반이 바이킹(데인족) 지배하에 들어갔다(데인로 참조). 바이킹들은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강을 거슬러 올라갔으며 발트 해 연안,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지를 장악하였다. 지중해와 동쪽 카스피 해에까지 바이킹 습격이 있었다.
[편집] 바이킹 세계
바이킹이 건설한 도시로는 잉글랜드의 요르비크(현 요크), 우크라이나의 키이우, 아일랜드의 더블린 등이 있다.
덴마크 출신 바이킹들은 프리슬란트, 프랑스, 잉글랜드 남쪽에 진출했다. 1013년-1016년에는 크누트 대왕이 잉글랜드 왕위에 있었다.
스웨덴 출신 바이킹들은 동쪽 발트족과 슬라브족의 땅(오늘날의 발트 해 연안,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에 진출해 루리크가 최초의 슬라브 국가를 건설하였다. 이 지역의 강을 따라 흑해, 콘스탄티노폴리스(현 이스탄불), 비잔티움 제국에까지 진출하였다.
노르웨이 출신 바이킹들은 주로 북서쪽과 서쪽으로 향해 페로 제도, 셰틀랜드 제도, 오크니 제도, 아일랜드, 영국 북부와 아이슬란드에 진출하였다. 아일랜드와 영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무인도거나 거주자가 거의 없는 상태였으며 노르웨이인들은 그곳에 정착하였다. 붉은 에이리크는 그린란드를 발견하여 정착이 이루어졌다.
1000년경에는 비아르니 헤리올프손(Bjarni Herjólfsson)이 북아메리카를 발견하였다. 붉은 에이리크의 아들 레이프 에이릭손과 토르핀 칼세프니(Þórfinnur Karlsefni)가 그린란드로부터 정착을 시도하였다. 그들은 발견한 땅을 빈란드(Vinland)라고 불렀다. 뉴펀들랜드 섬 북쪽 반도에 있는 랑스오메도즈 근처에 소규모 정착촌이 시작되었지만 원주민들과의 마찰과 기후 변화로 몇해 이상은 지속되지 못하였다. 랑스오메도즈의 고고학 유적지는 현재 유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다.
바이킹의 해외 진출이 최고점에 달했을 때 북반구가 수백 년 동안 유난히 추워지게 된 소(小)빙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이지 있다. 이때문에 그린란드의 식민지는 몇백 년을 못가고 몰락했으며 바이킹의 서부 진출도 멈추었고 바이킹의 고향도 타격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