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그나 카르타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마그나 카르타(Magna Charta Libertatum)는 1215년 6월 15일에 영국의 존 왕이 귀족들의 강요에 의하여 서명한 문서로, 국왕의 권리를 문서로 명시한 것이다. 흔히 영국 민주주의의 시발점으로 강조되지만, 문서 자체에 민주주의 요소는 별로 없다. 다만, 국왕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문서화하기 시작하여 국왕의 절대 권력에 제약을 가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으며, 이 문서에서 민주주의의 시작은 후대에 국왕과 대립이 발생했을때 계속 확대 해석된 것이다.
목차 |
[편집] 배경
1189년 헨리 2세의 뒤를 이어 리처드 1세가 즉위했다. 그러나 그는 10년간을 십자군 전쟁과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외국에 있었고 본국에는 단지 6개월 가량만 있었다. 따라서 사실상 그의 동생인 존이 사실상 왕 역할을 하고 있었다.(존은 헨리 2세의 아들이자 리처드 1세의 동생이다.)
10년 뒤인 1199년, 사자왕 리처드 1세가 사망하자 존이 정식으로 대관식으로 올리며 즉위했다.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의 아들인 아서 왕자(브르타뉴 공)가 정당한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하였고 프랑스로 존 왕을 소환하였으나 존 왕은 거절하였다(이 때는 영국 왕은 프랑스 국왕과 신하 관계에 있었다.)
존 왕은 프랑스와 영토 전쟁을 명목으로 조세를 대폭 상향조정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전쟁에서 패해 노르망디의 대부분을 빼앗겼고 교황과 다툼을 벌여 파문을 당했다.
노르망디의 대부분을 빼앗기고 영주들과 대립관계에 놓였고 교회와도 맞섰으며 귀족이나 도시에 대해 과도한 세금을 매긴 존 왕에게 귀족과 성직자들이 반발을 일으킨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결국 영국내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편집] 경과
영국 귀족들은 무장병력을 이끌고 63개조의 요구사항이 적힌 서류를 들고 존 왕에게 찾아갔다. 런던도 반란세력에 의해 점거당한 마당에 존 왕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귀족들은 존 왕을 협박해 강제로 문서에 서명하게 하였다.
1215년 6월 15일, 존 왕이 서명한 문서. 이것이 바로 마그나 카르타(혹은 대헌장)이다.
[편집] 대헌장의 내용
다음은 마그나 카르타의 주요 조항 중 일부이다.
- 제12조 오래된 관습상 인정되어진 것(관례로 굳어진 것) 외의 과세 혹은 봉건 지원금은 귀족들의 자문을 거치지 않으면 부과할 수 없다. 다만 왕이 인질이 되었을 때의 협상금,왕의 아들이 기사가 될 때 필요한 비용,왕의 장녀가 시집을 갈때 필요한 비용 등은 예외로 한다.
- 제21조 대귀족은 동료 귀족에 의해서만 처벌될 수 있다. 그러나 큰 죄목(반역죄 등)일 경우로만 제한한다.
- 제39조 자유민은 동등한 신분을 가진 자에 의한 합법적 재판 혹은 국법에 의하지 않고서는 체포,감금,추방,재산의 몰수 또는 어떠한 방식의 고통도 받지 않는다.
조약의 내용들로 알 수 있듯이 마그나 카르타는 오직 성직자와 귀족, 그리고 봉건 제후의 권리만을 보장하는 문서였다. 또한 이 문서에서의 자유민이란 성직자,귀족을 뜻한다.
[편집] 결과 및 의의
마그나 카르타로 인해 왕의 권한은 크게 줄어들었고 귀족과 성직자들의 권리는 크게 늘었다. 이는 곧 의회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마그나 카르타는 원래 고위 신분만을 위한 문서였으나 후대에 가서는 모든 국민들의 대한 것으로 확대해석되었다.특히 12조에서의 왕의 과세권 제한내용은 이후에 발생한 권리 청원,권리 장전 등의 영국 시민혁명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고 영국 입헌 정치의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편집] 같이 보기
- 존 왕
- 리처드 1세
- 권리 장전
- 권리 청원
- 영국 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