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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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아르메니아어: Հայոց Ցեղասպանություն 하욕 체자스파누티운/ Մեծ Եղեռն 멕 에제른, 터키어: Ermeni Soykırımı 에르메니 소이크르므)은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반의 오스만 제국의 영토에 거주했던 소수 민족이자 변두리 지역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에 대해서, 다수파인 무슬림들이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무엇보다 대규모 학살은 제1차 세계대전중에 일어난 아르메니아인 강제 이주와, 거기에 따라 수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었다. 이것을 조직적 학살로 인정할지는 아직까지는 불확실하다. 21세기가 올 때까지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국제적으로 계속 이 사건에 대한 분쟁이 계속되었지만 아직은 난관에 부딪치고 있다.
목차 |
[편집] 문제 개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에 두 번에 걸쳐서, 오스만 제국내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이 일어난 것은 정확히 역사적인 사실로 알려져 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당시 터키에서 한밤중에 조직적으로 터키 군대가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한 사건이라고 주장한 일부 사람들은, 이와 관련된 사건을 아르메니아인 학살이라고 부르고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한 터키 정부를 비난한다.
두 번의 학살중에, 첫 번째는 압둘 하미드 2세 전제기인 1894년에서 1896년에 걸쳐 행해진 학살이자 습격이며, 이스탄불등 서쪽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오스만 제국 전체 국토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이 학살되었다.
두 번째는 제1차 세계대전중인 1915년에서 1916년에 걸쳐서 통일과 진보위원회(통칭은 통일파, 이른바 청년 투르크당) 정권에 의해 오래전부터 아르메니아인이 거주한 곳 (이른바 대 아르메니아)의 남서쪽에서 있던 오스만 제국령의 아나톨리아동부에서 아르메니아인 강제 이주로 인해 대부분의 아르메니아인들이 희생되었다. 두번째 박해에서는 대부분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조직적으로 학살된 결과로, 약 백만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대개 "아르메니아인 학살"이라고 하면 2번째를 말하는 경우가 많다.
또, 제1차 세계대전 뒤에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오스만 제국령의 아르메니아인 거주 지역을 포함해서 아르메니아 국가를 건설이 시도되었지만, 러시아 적군과 터키 혁명군의 공격 전에 이것은 분쇄되었다. 이 전란 때문에 대부분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목숨을 끊어버린 것은 틀림없이, 아르메니아인 학살로 대한 비난에는 이 견해로 둘 수 있던 문제도 포함되는 것이 있다.
2번째로 벌어진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둘러싸고 터키 혁명의 결과, [[1923 년]]에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면서 성립한 터키는 어디까지나 전시하의 강제 이주로 인해, 대부분의 아르메니아인이 사망했다는 견해를 나타내 보이고 있어서, 대전중에 오스만 제국 전체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일부에서는 간주되어 있다.
한편 아르메니아인 회사는 "학살"이 나치 독일이 유대인에 대한 홀로코스트와 같이 조직적으로 행해젔다고 말하면서 오스만 제국에서 터키에 이르기까지 "터키 국가"가 책임이 있다고 한다. 특별히 4월 24일은 1915년에 학살이 시작된 기념일이어서, 매년 터키를 비판하는 국제적인 캠페인이 행해지고 있다.
[편집] 박해 배경과 결과
[편집] 오스만 제국에 있던 아르메니아인 문제의 발생
오스만 제국에 있던 아르메니아인 회사는 아나톨리아 동부에 거주하던 농민들의 농촌 사회와, 이스탄불 등의 도시에 거주하고 교역 이산 공동체 등 전자와 후자로 나뉘어져 있었다. 특별히 후자는 무역이나 금융업으로 성공하고 부유한 상인층을 형성하고 건축가나 조폐관 등의 직무로 들어가면서 궁정, 중앙행정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오스만 제국 중앙 정부와, 공존하고 공영하는 공동체도 있었다.
19세기로 들어가면서 아르메니아인 중에서 가톨릭교로 개종 등을 통해서 서방 국가의 비호를 접수하고, 특권을 그리워하던 일부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이슬람교(이슬람교도)와의 사이에 문제가 생겨났다. 일부 부유층 사이에서는 서구와의 교류를 통해서 민족주의에 눈을 뜬 사람이 행겨났지만, 여전히 커다란 문제가 남겨져 있었다. 그러던 중에 러시아 제국이 남카프카스를 점령했고, 1877년에 일어난 러시아-투르크 전쟁으로 아르메니아인 거주 지대의 북동부를 점령하던 상황으로 결정적인 변화가 생겨났다.
아르메니아인 인구를 포함한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령 내의 아르메니아인을 지원한 것과 같이 1878년의 산스테파노 조약으로 아나톨리아 동부의 에르주룸, 디야르바키르, 시바스 등 일대의 아르메니아인 거주지역에 있던 아르메니아인 권리 향상을 목표로 한 개혁 실시를 약속하려고 했다. 이것을 계기로, 오스만 제국령 내의 아르메니아인 민족 운동이 시작되었고, 제국 밖에서는 아르메니아인 민족주의자들이 훈체크, 다시나쿠시툰(다시나크파)등, 아르메니아인 독립을 목표로 삼은 정당이 결성되었다. 이윽고 그들 중에서 제국에서 비밀 지부를 설립하고, 오스만 관리를 노린 폭탄 테러 활동을 시작했다. 한편, 그 전에 러시아-투르크 전쟁이 한창일 때 러시아 점령지에서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한 무슬림 난민과 크리스트교 아르메니아인이 러시아 군대와 협력하면서 무슬림을 몰아내는 소문이 오스만의 무슬림 사이에서 벌어졌고, 오스만 제국 지배하의 무슬림, 즉 도시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과 터키인이나 동부에 아르메니아인과 함께 거주하던 쿠르드족 사이에서, 아르메니아인을 국내로 추방하고 외국과 내통하고 테러를 벌이는 위험 분자로 보는 적개심이 높아지고 있었다.
[편집] 최대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1894년, 아나톨리아 동부의 주에서 거주하던 무슬림과 아르메니아인과의 대규모 충돌이 일어났다. 오스만 정부는 군대을 동원해 충돌을 진압하면서 2만명 이상의 희생자를 냈다. 아르메니아인 정당은 국제 여론에서 이것에 대해서 호소했고 유럽의 여러 나라는 오스만 제국의 대응을 비판했다. 다음해 1월, 영국・프랑스・러시아는 공동으로 아나톨리아 동부의 행정개혁안을 제시하고 이행을 오스만 제국에 통보했다. 한층 더 다음 1896년에는 아르메니아인 혁명 조직이 이스탄불의 오스만 은행을 습격・점령한 사건이 발생했다. 결국 무슬림과 아르메니아인의 충돌이 다시 재연되었다.
이 사전을 계기로 일부 부유층을 중심으로 오스만 제국에 반감을 가진 아르메니아인이 구미로의 이주에 따라 도시의 아르메니아인 인구는 급속하게 감소했다.
[편집] 제2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이 상황에서 오스만 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동맹국측에 가담하는 것으로 결정했지만 연합국측의 러시아군은 오스만 제국의 동부 국경을 점령했다. 이 때에 오스만 제국측의 아르메니아인 중에서 러시아군으로 참가하거나, 오스만 제국에 대한 게릴라활동에 포함된 수천명 단위로 나타났지만, 아르메니아인 게릴라로 인해서 무슬림 촌락이 습격되었고 무슬림이 살해된 사건도 일어났다. 이러한 행동은 영토 전쟁 이래, 오스만 제국 내외로 침투한 아르메니아인으로의 敵意을 확실한 결과를 결국 불렸다.
한편 학살을 부정하는 터키 측에서는 희생자가 대부분 아르메니아인인 것은 전시 상황에서 최전선의 혼란으로 인한 불행으로 간주하고 있다. 즉 살해당한 것은 전투원이나 러시아와 내통한 스파이들 뿐이며 4월 24일 최초의 희생자들도 거기에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혼란에서 살아남은 아르메니아인들은 유렵 연합이나 미국으로 이주했으므로 오스만 제국령 동부 아나톨리아에 있던 아르메니아인 공동체는 완전히 소멸했다.
이 문제가 지금도 더 심각한 정치적인 문제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제 2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대한 견해는 긍정파와 부정파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 따라서, 학살을 둘러싼 역사적인 사실의 규명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 일련의 박해에 의해 사망한 아르메니아인의 수는 가장 적게 추산하는 터키측 집계로 20만명에서 제일 많게 추산하는 아르메니아 인의 집계로 200만명에 이른다. 단 19세기 말에 오스만 제국령 아나톨리아 동부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 인구는 약 150만명이라고 하는 통계가 있으며, 20년 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의 인구도 자연 증가와 유출에 의한 감소에 따라 거의 같은 수였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들 중 이미 러시아령으로 도망친 자, 가톨릭교, 개신교,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강제이주의 대상에서 벗어난 자를 빼면 이중 상당수는 강제 이주를 당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수는 약 80만명에서 100만명 정도라는 추정도 있으며, 미국, 유럽, 일본등의 일부 연구자들은 60만명에서 80만명 정도가 아닐까 하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편집] 아르메니아인 학살 문제의 영향
1991년에 구 러시아 제국령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 공동체가 소비에트 연방에서 독립한 아르메니아는, 터키령으로 되어 있는 아르메니아인 거주지역에서 대항하여 영토적인 주장을 시작했다. 이로 인해 이 문제는 영토 문제를 내포하는 정치문제의 양상을 띄게 되었다.
터키 측에서는, 이 문제는 1970년대에 있던 아르메니아 과격파가 터키인에 대한 테러리즘으로 비롯된 반아르메니아 감정의 결과로 현대적 민족 문제이다. 또한 「학살」의 대상이 된 아르메시아인의 거주지역은 쿠르드인이 대부분 거주하는 쿠르디스탄의 한부분으로써、쿠르드족 문제도 관계 없지는 않다.
해외에서는 일본에서 이에 관한 관심은 적고, 구미에서는 아르메니아인을 향해 동정하는 사람도 많다、또한 각국에서 아르메니아・로비가 존재하기 때문에、의회에서 비난결의를 행했던 나라도 있고, 아르메니아인 학살은 일반적으로 역사적인 사건으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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